한국 최초의 성당건축물인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은 건축적인 면뿐 아니라 예술적 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추상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의 제대 유리화는 단연 눈길을 끈다. 제8회 가톨릭미술상 특별상을 수상한 고(故) 이남규(루카·1931~1993)씨가 1974년 한국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유리화를 제작, 설치한 것도 중림동 약현성당 유리화의 가치를 높인다.
유리화가 장식품으로만 여겨지던 시절, 이남규씨는 작품에 예술혼과 깊은 신앙심을 담아 예술로서의 유리화를 만들어냈다. 약현성당 외에도 서울 혜화동, 시흥동, 역촌동, 절두산 순교성지, 응암동성당, 수원 여주성당 등 전국 47곳의 성당 유리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독특한 개성미가 넘치는 회화적 양식의 이남규씨 작품은 종교와 국경도 초월해 사랑을 받아, 이스라엘 나사렛 성모영보성당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도 작품이 설치됐다.
또한 1983년에는 명동성당 유리화 복원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역사적 의미를 강조한 그는 건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작업에만 몰두했다. 당시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낮을 잊은 채 작업에 매달린 것이다.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많은 이들이 지금의 아름다운 명동성당 유리화를 만날 기회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20여 년에 걸쳐 활동했던 만큼 그의 화업에 얽힌 일화들도 많다. 유리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보니 여주성당 작업 때에는 유리를 적게 넣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서울 역촌동성당 작품은 구조적 문제를 뛰어넘어 더욱 장중한 느낌의 ‘십자가의 길’을 완성시켰다. 특히 병중에 있음에도 그는 빛나는 예술혼을 불태웠다. 육체적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는 화업을 “아침에 농부가 밭으로 나가 밭을 일구는 일과 다름이 없다”고 여기며, 즐거이 그림을 계속했다.
서울대 회화과에서 장발, 장욱진 교수에게 사사하면서 종교예술에 심취한 이남규씨는 작업의 어려움을 내내 기도로 버텨냈다. 그가 남긴 기도문에는 그의 신실함과 뜨거운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보잘 것 없는 내가 당신을 넘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넘보는 일을 조금만 허락해주십시오. 더 이상 내가 한눈을 팔지 않도록 하시고, 이 작은 몸짓으로 당신만을 찬미하게 하십시오. 오직 그것만이 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무한한 당신의 시공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의 달콤한 향기를 맛볼 수 있게 하시어 이 오죽잖은 손짓이 당신의 찬미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죽더라도 내치지 마시고 어여삐 보시어 저 맨 아랫자리에서라도 당신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쉼 없이 작업했던 이남규씨는 회갑 기념전을 준비하다 쓰러져, 결국 병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급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 지 17년 만에 그의 삶을 오롯이 남긴 책 「이남규, 한국 유리화의 선구자」(열화당/288쪽/2만 원)가 발간됐다. 이 책은 자서전도, 전문적인 미술평론가가 쓴 평전도 아니다.
이남규씨의 아내 조후종 교수가 남편과 함께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쓴 회상록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술가를 바라본 아내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았다. 이와 함께 이남규씨의 유화, 유리화, 밑그림 53점, 사진과 함께 보는 연보가 실려 있다.
왕성히 활동하던 때 예술과 종교를 논하던 인물들의 모습이 상세히 드러난 미시사적 기록이기도 한 이 책은 이남규씨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기초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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