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는 기쁨과 넉넉함이 밀려옵니다.
율법은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인간은 율법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배웠기에, 율법과 인간은 긴밀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폐지하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을 없애지 않겠다는 말씀이며, 율법을 완성하겠다는 말씀은 인간을 완성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과 하느님께서 삶의 길잡이로 주신 ‘율법’이 제 역할과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율법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율법을 잘못 알아듣고 받아들인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율법을 잘못 전해주고, 잘못 받아들이도록 조장했던 이들과, 자기식대로 받아들인 이들을 향한 지적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취지나 정신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자세히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라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접속사 “그러나”를 강조하면, ‘하느님께서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은 잘못되었으니, 이제 새롭게 말한다.’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런 해석이라면, 예수님께서 말씀(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폐지하러 오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춰 보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잘못하신 것이 아니라, 중간에서 전해주고 알아들은 이들이 잘못한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잘못 들려주고 받아들였던 이들이 바로잡으면, 율법은 본래의 취지대로 전달되고, 실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부연설명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율법)의 본래의 뜻은 이러이러하니, 이제부터는 내가 말하는 것을 잘 듣고 그대로 실천하면, 그 뜻(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본래 취지는 하느님과 이웃을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떠난 율법의 준수는 형식주의를 면치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짓는 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결코 그 율법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율법 조항에 의하면,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하고 빈정거리며 원망하는 것, 화해하지 못하여 법정에 가는 것,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거짓 맹세하는 것 등은 큰 죄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엄하게 다루며 말씀하십니다. 형제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자신과 이웃의 영혼에 상처가 되는 것이라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더욱이 말할 때,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율법에서 가르치는 바에 대해 조건을 붙이지 말고,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 전 대법원은 50여 년 전에 간첩 혐의로 사형 집행된 이에게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이미 사형 집행된 사람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것을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는 살인당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이를 사형집행으로 몰고 간 진정한 죄인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죄인은 바로, 자기와 생각의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두고, 이를 방조하고 사형판결에 손을 들어주었던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한편으로, “예”와 “아니요”를 구분할 용기가 부족한 우리 자신 때문에 저질러진 만행이 아닌가하며,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와 “아니요”를 구분하였던 제1심 재판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니요” 하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무죄판결을 내렸고, 그 후 그는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되는 아픔도 겪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비난을 넘어 정의를 지킨 훌륭한 법철학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영원히 기억될 비난과 칭찬은, 현재의 우리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온전히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자만이 진정으로 웃으며,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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