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흔적(天主之迹). 이 개념은 창조계를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존재론적으로 추구하는 사유의 산물이다. 성리학(性理學)이 그리스도교의 창조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사물이 존재하게 된 연유를 묻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사물이 있게 된 까닭(所以然)을 사물에 내재하는 이치로 이해하고자 한다. 반면, 리치는 사물의 존재를 중국인의 사유에 익숙한 개념인 음양(陰陽)의 구성으로 설명하지만, 음양은 물질적 개념이 아니다. 이렇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리치의 해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근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 밖에 있는 존재의 원인을 운동인(the efficient cause)과 목적인(the final cause)으로 이해한다. 이에 근거하면, 하느님은 창조계를 지어낸 보편적 운동인이며, 창조계 밖에 존재하는 목적인이다.
만약 하느님이 창조계의 사물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이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계시는 것이며, 마치 손과 발이 몸에 붙어 있는 것과 같다. 마치 흼(百)이 말(馬)에 있어 흰 말(白馬)이 되고, 차가움(寒)이 얼음에 속해 있어 차가운 얼음(寒氷)이 되는 이치와 같다. 또한 햇빛이 수정 속에 있는 것과 같고, 달구어진 붉은 쇠에서 빛나는 것과 같다. 즉 원인(所以然)이 결과(已然)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如所以然之在其已然, IV, 9) 끝(결과)으로써 발단(원인)을 추론하여 하느님께서 사물 속에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수정에서 빛이 떠나고, 쇠에서 빛이 떠날 수 있으나, 하느님은 만물을 떠날 수 없고 만물과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는다(不雜不離)는 점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흔적’(天主之迹)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표현은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이후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했던 치열한 노력에 기인한다. 하느님과 세상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초월의 하느님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인간과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시는가? 더구나 세계 내적 경험에 한정된 인간의 언어를 생각한다면, 초월의 하느님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교의 신관을 설명해 주는 삼위일체의 하느님관은 나자렛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계시한 사건에서 출발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을 인간의 언어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년)는 처음으로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을 언급했다. 물론 이 근거는 하느님의 모습(Imago Dei)에 따른 인간의 창조(창세 1,26)를 토대로 하지만, 그리스도 사건을 더욱 깊이 통찰하기 위한 길이기도 했다.
‘하느님의 흔적’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체험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인간의 언어 문제로 귀속된다. 그리스도교는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유비이론을 제시했고,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존재의 유비는 하느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창조계 안에서 유비될 것을 찾는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창조계 안에서 하느님은 ‘무엇에도 비교될 수 없는 더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에 귀착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느님은 필설로 묘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말을 해야 하는 모순에 처한다. 이 모순의 극복에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신비로 주어진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이해하려면 삼위일체 하느님을 언급해야 되고, 표현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말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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