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도시 빈민들, 교육은 고사하고 거리로 내몰리는 아이들, 빈민 노동자들의 주머니 돈을 노리는 유흥시설들, 가난은 넘쳐나고 희망의 뿌리는 보이지 않았다.
▲ 프라도회 창설자 슈브리에 신부의 흉상. ‘오직 성인들만이 세상을 쇄신한다’는 글귀가 흉상 전면에 새겨져 있다.
이후 1860년 12월 10일, 그 동네에서도 ‘저급’에 속했던 카바레 ‘프라도’(Prado)’는 가난함을 살고자 하는 사제들의 거점으로 변신했다. 슈브리에 신부가 이를 매입함으로써 ‘가난한 사제단’의 공식적 탄생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프라도회’ 명칭은 이러한 배경에서 기인한다.
카바레 프라도 매입후 슈브리에 신부는 회심의 구체적 실천을 길거리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신앙 교육에서부터 시작했다. 당시 8살 정도부터 공장으로 내몰려야 했던 어린이들을 받아들였고 또 시골에서 상경, 미사 참례 시간도 없이 시장으로 공사판으로 일을 나가야 했던 청소년들과 삶을 나눴다. 특히 아이들이 하느님을 알고 체험하도록 이끌면서 그 과정을 통해 글을 깨우치게 하고 교육 받도록 했다.
창립 150주년의 해를 맞고 있는 프라도회 국제 본부는 리옹 변두리 뒷골목 그곳에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당시 카바레 건물은 남녀 청소년들의 기숙사, 경당, 집무실, 사제관 등으로 개조해 사용됐는데 그 모습들이 고스란히 남아서 철저한 가난의 삶을 살고자 했던 슈브리에 신부의 음성을 들려주고 있었다.
슈브리에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복음을 전하는 ‘가난한 사제 양성’의 독특한 교육학을 고안, 자체적인 사제 양성에도 힘쓴 것으로 알려진다. 1865년 소신학교를 프라도에서 개교했는데 그 모습도 본부 건물에서 더듬어 볼 수 있었다.
1877년 마침내 4명의 신부가 사제품을 받음으로써 사제 양성의 결실을 보았던 슈브리에 신부는 이와 함께 가난함의 사목을 나누기 위해 사제들을 찾아 뜻을 모으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로부터 150년이 흐른 2011년 현재, 슈브리에 신부를 따라 ‘프라도회’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제들은 50여 개국 1250여 명의 숫자로 늘어나 있다. 또 평신도들로 구성된 프라도 형제회, 프라도 수녀회 등 함께하는 가족들도 구성돼 활동 중이다.
현재 국제 본부 건물에는 총장 신부를 비롯 부총장 사무총장 프랑스 프라도회 책임자 등이 거주하고 있다. 프라도 대신학교가 있는 리모네에는 류달현신부(의정부교구), 김형진 신부(서울대교구), 박광훈신부(대구대교구) 등 3명의 한국 회원도 프라도회 국제양성 과정 참여를 위해 머물고 있다.
프라도회가 설립 이후 활동의 빛을 발한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전쟁 복구로 인한 현대적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사목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최근 들어서는 이주 노동자들을 비롯 중동 지역 등에서 폭력 테러 전쟁으로 고통 받는 각 지역교회 소외 계층에 대해 다양한 형태로 ‘복음적 가난’의 의미를 실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75년 고 이용유 신부의 서약으로 프라도회가 정식 활동을 시작했으며 회원들은 본당을 비롯 노동사목, 이주민사목, 신학교 사제양성, 사회복지, 병자사목, 학생사목 등 특수 분야에서 고유한 몫을 실천하고 있다. 양성 중인 회원을 비롯 1백여 명이 활동 중이다.
프라도회의 특징은 재속 사제회라는 점. 회원들은 소속 교구장 인사 명령에 따르며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화’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 배려를 하는 주교들을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