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교구장 도이 타츠오 대주교는 1943년 8월호 교회가 발행하는 「성(聲)」잡지에 발표한 「대동아 전쟁과 가톨릭」이라는 글에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목적은 동아시아 민족들을 해방시키고 오래 지속될 평화 건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달 뒤인 9월 28일 일본 교회는 「일본 천주교 전시 활동 지침」을 발표하고 대동아 전쟁의 목적 완수에 매진할 것을 표명했다.
당시 교단 지도자들은 일본 가톨릭신문 지상을 통해 『이번 성전(聖戰)은 … 사사로운 것을 버리고 정의를 세우기 위한 대의(大義)의 성전(聖戰)』이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소위 「대동아 공영권」내의 지역에 파견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후쿠오카 타이세이 중학교를 교단이 직접 경영하는 「대동아 신학교」로 변경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앞서 일본 천주교 교단 대표 도이 타츠오 도쿄 대주교는 1941년 12월 25일자 교서를 발표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지닌 적자(赤子)로서 조국이 요청하는 것들에 솔선수범 응할 것을 호소했다.
일본의 전쟁 승리를 가톨릭 교회가 기원하고 지지한 기록은 일본이 팽창정책을 시작한 첫 걸음인 1894년 청일전쟁 때부터 발견된다. 당시 일본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한 본당이 있었고 러일전쟁 당시에도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전쟁을 지지하고 협력했다. 교회가 전쟁에 반대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오히려 종군을 위한 의연금을 모집했다.
1935년 3월, 네 명의 큐슈의 교구장들은 합동으로 사순절 교서를 발표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고 황국(皇國)을 위해 열성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거의 같은 내용의 교서가 주일 교황청 사절 바오로 마레라 대주교를 위시한 12명의 일본 가톨릭교회 대표자들에 의해 4월 25일 공동교서로 발표됐다고 당국에 「가톨릭 애국비행기」를 헌납했다.
1944년 7월 일본 천주교 교단은 「국민 총궐기 운동」을 실시했다. 일본 가톨릭교회는 1944년 7월 8일 신사참배를 하고 16일에는 전국 교회나 수도원에서 필승 기원제를 드리도록 각 교구에 지침을 하달했다.
이런 지침에 근거해 일본 천주교 교단의 총무이던 타구치 호오고로오 주교는 「성(聲)」1944년 8월호에 「신자 총궐기를 호소함」을 게재해 「총진군을 결행하자」고 호소했다.
일본 교회의 전쟁 협력과 신사 참배 문제는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신사 참배 문제로 가톨릭 교회가 탄압을 받는 이이 발생하자 1935년 나가사키 교구의 하야시카 히사노스케 주교는 2월 23일자 훈령을 통해 참배를 허락했다. 교황청도 1936년 일본 주교들의 입장을 근거로 『신사 참배는 단순한 애국심의 표현이므로 참배를 허락한다』는 지침을 전달했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 신사 참배를 십계명 중 제1계명을 거스르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교회의 가르침은 이후 크게 변화됐고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 등에도 신사 참배가 강요됐다.
신사 참배에 대한 이같은 입장을 바탕으로 이후 일본 교회는 전쟁 협력을 위한 국민 총궐기를 시작하면서 신사참배를 적극 권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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