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최근 지난 2000년 동안의 교회 과오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원하는 예식을 거행했다. 역사는 시대의 산물로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여건에 영향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과오에 대해서도 더욱 깊은 성찰을 요한다. 교황의 용서 청원과 관련해 역사가들에 의해 일반적이고 교회의 과오라고 지적되는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살펴본다. 그 첫 번째로 십자군 전쟁을 살펴보고 이어 이단 심문, 유다인 학살, 선교지역 원주민 학살 등을 신앙과 역사의 눈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집필은 광주가톨릭대학교 김희중 신부가 맡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해 9월 8000여명의 순례객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교회는 역사적 진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진지한 역사적 탐구에 의해 자녀들의 과오가 발견된다면 교회는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고 말하면서 『지난 세기 교회가 행한 과오들에 대해 솔직하게 반성하고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순 제1주일인 3월 1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용서의 날』예식을 거행하며 가톨릭교회의 2000년 역사에서 잘못한 일들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했다.
그러나 교황이 청한 과거사의 잘못이 가톨릭 교회에만 일방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런 역사적 사건에는 서로간의 공동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우선 우리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고 화해의 물꼬를 트며 새 천년을 맞으면서 화해와 용서, 평화와 일치를 지향하는데 온 인류가 동참하기를 기원했다고 본다 .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먼저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다 해서 공동의 과오에 대해, 다른 한편이 용서와 화해를 청해야 할 의무가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 역사에서 타종교와의 가장 큰 충돌의 하나는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교 세계 사이에 일어난 예루살렘 성지 탈환과 정복을 위한 전쟁일 것이다. 이슬람교 세계에서는 성전(聖戰·Ghihad)으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십자군(十子軍)으로 대항하여 거의 2세기 동안 전쟁을 벌여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성전(聖戰)과 십자군(十子軍) 원정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인 배경과 진행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언급한 그리스도교 과거사의 잘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말부터 13세기까지 8차례에 걸쳐서 이슬람교 세력이 그리스도교의 무덤을 파괴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강탈함으로써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가 탈환하기 위해 일어난 쌍방간의 전쟁이다. 십자군이란 명칭은 이 전쟁에 참가했던 자들의 의복에 십자가 표지를 붙인 것에서 유래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교 영향권에 있는 동유럽과 소아시아가 이슬람교 세력에 의해 점령되기 시작하였다. 633~643년에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의 나라들이, 669~798년에는 아프리카 북부가, 그리고 711~719년에는 스페인이 정복되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가 위기를 느끼고 불안해하였다.
1010년에는 모슬렘 교도인 하킴(Hakim) 군주가 당시 모슬렘 교도들에게까지 성지로 존중되어온 성지들을 강탈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을 파괴하였으며, 1048년 이래 터키의 셀주크 왕조가 동로마제국의 소아시아 국경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070~71년에는 셀주크 터키족이 지중해 동해안에 진출하여 팔레스티나 성지를 점령하고 순례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런데 초기 교회 때부터 순례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으므로, 특히 성지와 순례자들을 방어하고 보호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로 생각하였다.
십자군의 참가자들은 두 가지의 동기를 가졌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겠다는 개인적인 신앙 차원의 서원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군에 참가하는 동안 자기 가족과 재산을 교회가 보호하는 물질적인 이익과 대사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1095년 삐아첸자(Piacenza)와 끌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제국의 알렉시오 황제가 파견한 자들로부터 동로마제국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 듣고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고 동방의 그리스도교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자고 호소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돌아가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이스라엘 성지 순례에 대한 열망, 동방과의 무역을 원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상업적인 야심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특히 십자군에 참가하여 대사(大赦)를 받고 전사할 경우 순교자가 된다는 것도 열성적인 신자들을 원정군에 쉽게 참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제1차 원정에서는 비조직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농부들도 많이 참가하여 교회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일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라인 지방을 지날 때, 흥분한 나머지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로 유혈 참사가 일어났는데 발칸 지역을 지날 때에도 지휘자의 통솔을 제대로 받지 않은 이들은 지방 주민들에게도 방화와 학살로 참극을 일으켰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많은 원정군들이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도 전에 셀주크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원정군들이 악전고투 끝에 1098년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부녀자와 유아와 노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참살하는 비 그리스도교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서유럽에서 이곳까지 도달하는 전투에서 이슬람 군들의 매복병들의 습격을 받아 매일 매일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하는 가운데 겨우 살아 남은 이들의 보복심리와 이슬람 군들의 항전의 악순환이 서로를 살육의 참상으로 몰고 갔다.
이런 악순환의 결과는 생사의 기로에서 양측 모두 이성적인 자제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존의 본능만이 절대 기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원정은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에뎃사가 함락(1144년)되면서 시작되었는데(1147~1149),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의 설교로 추진되었지만 터키인들가의 여러 번 전투에서 전멸되어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제3차 원정(1188~1192)은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Friedrich) 황제가 인솔한 잘 조직된 십자군들이 이코니움에서 터키인들과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황제가 1190년 살레프에서 익사함으로써 지휘자를 잃은 군대는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영국 왕 리차드(Richard) 1세, 프랑스의 필립(Pilipp) 2세 등이 참가하여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십자군들이 성지의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고 살라딘 술탄과 화해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평화로운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제4차 원정(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호소로 시작되어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두가 마지막으로 이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완전히 교황의 의사를 거스르고, 이기적이고 상업적인 이해관계에서 베네티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1204.4.13) 라틴제국이 그곳에 설립되는 엉뚱한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도시는 심하게 약탈되고 황폐하였으며, 이러한 난폭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은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동방세계의 방위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5차 원정(1217~1221년)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이 결정되어 1217년에 실행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파견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아 파문을 받았다. 원정군은 동유럽의 신흥 그리스도 국가의 약소한 군사력으로 편성되어 이집트를 공격하여 마미에타를 공격하는 적은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지 재탈환을 복음정신에 따라 평화로운 포교로 해야 한다는 본래의 정신에 따라 무방비 상태로 성지에 가서 술탄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술탄이 성인을 너그럽게 대우하여 풀려났고, 이것을 계기로 프란치스코회의 평화로운 선교활동이 성지에서 시작되었다.
제6차 원정(1228~1229년)은 교회 당국과는 무관하게 파문중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개인적인 원정이었다. 그는 에집트 술탄과의 담판을 통해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반환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그후 1244년 결정적으로 다시 잃게 되었다.
제7차 원정(1248~1254년 및 8차 원정(1270년)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실제적인 원정은 모두 끝났다. 프랑스의 聖王 루이 9세는 우선 에집트를 정복한 후에 성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1205년 4월 카이로에서 완패당해 후퇴했는데 그의 군대에 전염병이 돌아 전의를 상실하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를 위해서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 자신은 이슬람에게 다미에타(Damietta)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서방에서는 차츰 십자군 원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비폭력적인 설교를 통해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유럽 자체내에서는 이교도 문제, 즉 스페인의 무어인, 이교 슬라브인,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 등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가왔다. 이로 인해 십자군 원정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십자군 원정의 결과는 여러가지이다. 서구 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계기를 마련했고 은둔적인 수도 생활에서 병든 순례자에 대한 봉사와 이교도들로부터 성지를 보호하는 등 외적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기사 수도회를 출현케 하였다. 또 비잔틴과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이 스콜라 사상으로 발전을 가능케하였고 서구의 공동체 의식을 크게 강화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긍정적인 결과 이외에도 교회내·외적으로 씻을 수 없는 오점도 남겼다고 본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교황권이 신장되는 계기도 되었지만, 동시에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교황권이 크게 실추되는 결과도 가져왔다. 이것은 사목자의 권위가 교회 본연의 사명에 충실함에서 기인해야지 세속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은 물거품과 같다는 교훈이 아닌가 생각한다. 십자군 원정에 대한 평가도 관점과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드러날 수도 있겠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성 루이 9세 왕처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 성지 회복이라는 원래의 십자군 정신에 투철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며 방탕한 십자군들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전혀 걸맞지 않은 패악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물론 서방 그리스도인들이 부지(失地) 회복과 그리스도 무덤의 재탈환, 그리고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정당성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당시의 정교일체적(政敎一體的)인 중세 시대에 교회도 당시 정치·사회의 중심의 역할을 수행했노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라는 사회적인 공동체의 역할과 그리스도교 본연의 정신과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원리에 따라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가능한한 복음 정신에 따라 평화와 정의의합치하는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자비로운 용서와 평화적인 대응과 한없는 인내가 진리와 정의가 멸시 당하고 불의한 폭력이 가중되는데 악용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그저 참고 용서하며 그들이 회개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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