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주일이 되면 나에게는 어렸을 때, 좀 더 멋있는 나무가지로 예수님을 환호하고 축성을 받기 위해서 예쁜 향나무 가지를 구하기 위해 애쓰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때의 어린 마음에도 성지주일 전례는 참으로 이상스럽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같은 주일 예절인데도 미사 전에는 길에 자기네 겉옷을 깔고 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호하는 군중에 관한 복음말씀을 듣다가, 반시간도 채 못되어 미사 동안에는 바로 그 군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무섭게 외치는 복음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올리브 산 쪽에서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분이 놀라운 방법으로 당신 제자들에게 그 입성을 준비하도록 하셨다는 이야기도 전해주는데, 이는 예수님의 수난이 우연히 발생한 불행한 일들의 결과가 아니라, 그분이 하느님의 계획에 순종하시며 자원하여 받아들이신 결과라는 것을 미리 말해준다.
『예수께서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나귀는 사실『말(馬)』을 갖기에는 너무 가난하였던 사람들이 운송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짐승이었다. 그러니 나귀타고 오는 모습, 더구나 새끼나귀 타고 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히려 초라한 행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귀타고 오시는 그분을 군중들이 마치 왕의 행차라도 환영하는 듯이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기까지 하면서 환호한다. 예수님을 앞서거나 뒤따르던 군중들이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받으소서!』라며 환호하는데, 「호산나」라는 말은 본디 『「제발」구해주소서!』라는 뜻을 지닌 말이었는데, 큰 행렬이 있을 때 백성이「환호」의 표시로 사용하곤 하였다. 우리 말의「만세!」라는 환호의 어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 받으소서』라는 시편 말씀은 본디, 대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자들을 예루살렘 시민들이 환영할 때 부르던 노래였는데, 여기 복음서에서 「오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의미를 띠고 있다.
그리고 말(馬)은 많은 경우에 군사적 용도로 사용되어서 그런지 힘과 전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데 비하여, 나귀는 전쟁과 싸움을 거부하는 서민들의 평화와 겸허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복음사가는 새끼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평화와 겸허의 메시아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부활의 빛 속에서(참조 요한 12,16) 이러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 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라는 즈가 9,9의 예언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참조 : 마태 21,5 요한 12,15). 예수께서는 분명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곧 메시아」로서 세상에 평화와 정의를 세우시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세우시는 평화와 정의는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였던 대로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을 잔인하게 제압하는 방법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면 「약하고, 낮은」방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사랑의 방법으로」이룩된다는 것을 복음말씀은 말해준다. 이런 「메시아」의 모습은 오늘 제2독서(필립 2,6~11의 그리스도 찬가)에 나오는 방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당신 자신을 온전히 다 비우시는」십자가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오늘로서 일년 동안의 교회의 전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성주간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의 이중적인 모습은 많은 질문을 던져준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자세는 어떤가? 자신들의 겉옷마저 길에 깔 정도로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다가 불과 며칠만에 돌변하여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치던 그 군중은 바로 우리 자신의 반영일 수 있지 않은가? 그 군중의 이중성(양면성)은 오늘날 우리들의 이중적 모습의 반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잘 되어 갈 때에는 봉사활동도 해가며 신나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어떤 불미스러운 일을 겪고 나서는, 너무도 어이없게도, 언제 그렇게 열성적이었느냐 할 정도로 그렇게 쉽게 하느님과 교회를 멀리하고 냉담 중에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가! 또 성당 안에서는 참회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다가도, 생활 현장에 들어서기만 하면 언제 성당에 다녀왔느냐는 듯이 불의한 욕심에 가득차서 이웃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런 삶이야말로 한편으로는 박수치며 환호하다가,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쳤던 군중들의 모습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들의 언행에 쉽게 좌우되는 「인간-신앙」이 아니라, 십자가의 괴루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참된 「하느님-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무력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참조 : 1고린 1,22~25 필립 2,6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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