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원고에서 축복은 인격체가 받는 것이지 물질이 아니라고 말한데 대하여 질문이 있었기에 다시 한번 대답한다.
소위 성물축복의 경우에도 축복된 그 물건(십자가 묵주 성상 등)에 하느님의 신통한 힘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경하는 분의 신성(神性)이나 능력이 그 물건 안에 내재(內在)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 신앙으로 공경하는 대상을 가시적으로 표현해주는 상징물에 불과한 것이다.
△ 십자가 축복기도 : 『당신 성자의 십자가를 모든 축복의 원천이 되게 하시고 모든 은총의 샘이 되게 하신 하느님 아버지, 우리 시앙의 표지로 이 십자가를 마련한 우리를 인자로이 도와 주시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를 항상 묵상하는 우리로 하여금 마침내 부활의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소서』
△ 성모상 축복 기도 : 『하느님, 당신은 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의 미래 영광의 모습을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에게 앞당겨 허락하셨으니, 성모 마리아의 성상을 마련한 당신의 자녀들이 굳은 신뢰를 가지고 모든 간택된 백성에게 덕행의 모범으로 주신 성모님께로 시선을 향하게 하소서』
△ 묵주 축복 기도 : 『전능하신 하느님 비오니, 이 묵주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는 당신의 신자들이 복되신 동정녀를 신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항구히 묵상함으로써 기도로 묵상하는 바를 생활로 실천하게 하소서』
이상 몇가지 인용한 축복 기도문을 보면 내용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위한 기도이지 물건을 위한 기도는 아니다. 즉 십자가나 성상이나 묵주에게 무슨 신통한 힘을 주는 기도가 아니고 그런 물건을 사용하거나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위한 기도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인간의 활동이나 전례 생활이나 신심 생활에 관계되는 물건이나 장소를 축복하되, 언제나 그 물건이나 장소를 사용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만큼, 신심생활에 등한하면서 신심도구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신자답게 살지 않으면서 주택을 축복받는 것이나, 평소에 교통법규를 무시하면서 자동차 축복을 받는 것 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하느님을 시험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축복받은 물질이 인간을 보호해 주기를 기대하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정방문을 해보면 장식한 선반 위에 성상을 모셔놓고 촛대까지 갖추어 놓았는데, 성경책을 찾으면 한참동안 헤메대가 겨우 찾아온 책이 먼지로 덮여 있으니, 그 가정의 신앙 상태를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공교롭게도 오늘이 성지주일인데, 아마 많은 가정에는 성당에서 행렬에 사용한 나뭇가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나뭇가지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장면을 상기시키는 일회용 상징물에 불과하므로 예식이 끝나면 버리는 것이다. 혹자는 내년 재의 수요일에 사용할 재를 만들기 위해서 보관한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 가지로 재를 만들어야 된다는 법도 없고,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성당에서 적당량을 가지고 있으면 되지, 굳이 각 가정에 모셔둘 필요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말로 그 가지는 소위 성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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