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말부터 2010년 초 국내 극장가에 조용한 돌풍을 몰고 왔던 영화 ‘위대한 침묵’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눈 덮인 알프스 산의 정적 속, 별빛 사이로 비춰지는 수도원, 이어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수도승들의 나지막한 기도소리….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시작점, 영화 배경이 되었던 프랑스 샤르트뢰즈의 카르투지오 수도원(그랑드 샤르트뢰즈: Le Grande Chartreuse)을 찾아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 수도원으로 오르는 길에 세워져 있는 침묵 구역 표지판. 카르투지오회는 철저한 고독과 침묵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자유롭게 하는 영성을 추구한다.
1084년, 성 브루노는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오직 하느님 안에서의 기도 생활과 엄격한 삶을 꾸려가기 위해 은수 생활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르노블의 위고 주교를 찾았을 때 ‘샤르트뢰즈’라는 장소를 제공받았다. 험준한 산맥에 둘러싸인 인적 없는 광야였다.
세속을 떠나 오직 하느님 안에서 가난과 참회의 관상 생활을 하고픈 열망에 가득 찼던 브루노 성인이 그 상황 안에서 기도, 묵상, 노동, 청빈의 규율을 지키며 수도회 기초를 세워가던 심정을 가늠해 본다. 수도원 가는 길 계곡에서 발견한 다리. 이름이 ‘브루노’였다. 시토 지역처럼 이곳 역시 천년에 가까운 수도원 역사가 지역 곳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수도원에 도착했으나 입구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방문객 출입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특히 여성들은 수녀들조차 방문을 불허한다. 담장 밖으로 드러난 건물 모습을 살피며 영화 장면 속 수도원 내부를 상상할 뿐이다. 수도원 건물은 1688년에 지어진 것이다. 초기 건물은 현 수도원보다 1km 정도 더 높은 곳에 있었으나 눈사태로 붕괴돼 지금 위치에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아쉬움을 대신해 20여 분 정도 거리에 있는 수도원 박물관을 방문했다. 수도회와 수도원 생활을 소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며 1951년 개관했다. 과거 평수사들이 생활하던 수도원을 외부 공개용으로 재단장해 놓은 것이다. 통상 동절기(11월부터 4월까지)에는 휴관하지만 멀리 한국에서 찾아 온 방문객들을 위해 특별히 공개한다고 했다.
수도회 역사를 담은 역사관을 비롯해, 수도자들 생활 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수도자 방, 전시관 등으로 꾸며진 박물관은 매년 25만 명 정도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고 ‘위대한 침묵’ 영화 상영 후에는 더 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고 박물관 책임자가 들려주었다.
▲ 1605년부터 수도원에서 만들고 있는 샤르트뢰즈 리큐르. 130여 개의 약초 추출물을 첨가해 참나무통에서 5년 정도 숙성 과정을 거친 것이다. ‘리큐르의 여왕’이란 별명을 지니고 있는 이 증류주는 수도원의 주 수입원이 되고 있다.
간단한 소개와 함께 박물관 탐방은 수도자 방에서부터 시작됐다. 카르투지오회의 출발은 고독한 삶을 통해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자유롭게 하는 영성의 추구였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그 영성을 원래 목표대로 추진, 보존하기 위해 그들만의 독특한 관습과 구조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수도회 규칙을 제정할 때에도 영성 내용에 대한 규정보다는 수도자들이 독방에서 그야말로 용맹정진하며 하느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잘 조성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카르투지오회 수도원 구조의 특징인 ‘독방’은 이러한 노력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 1, 2층 복층 구조의, 요즘 세상 기준으로 치면 외부와 차단된 독립주택 같은 형식이었다. 침대, 기도처, 책상, 식탁으로 구성된 2층의 생활 공간과 작업장 개인정원으로 꾸며진 1층의 노동 공간 형식의 구조는 보다 철저히 고독과 침묵에 몰입하기 위한 장치들이라 볼 수 있다.
수도자들은 새벽기도 아침기도 저녁기도 등 세 번의 공동 기도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들을 이곳에서 지낸다. 하루 한 번 식사도 혼자 하면서 개인적 고적함 속에 영적묵상, 기도, 공부, 육체노동 등으로 일과를 보낸다. 철저한 침묵은 물론이다. 입을 여는 시간은 공동 기도 시간 및 일주일에 한 번 산책 때 정도다.
음식은 각 방에 딸린 조그만 구멍으로 전해지며 어떤 경우에도 육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또 방에서 식사할 때는 반드시 창 밖 자연 경관을 보면서 하도록 권고된다. 영화에서 창틀에 앉은 채 밖을 내다보며 식사하는 수도자 모습이 스쳐갔다. 이것은 자연을 내다볼 때 하늘을 먼저 올려 보게 됨으로써 밥 먹는 시간에도, 즉 항상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의미다. 식탁이 창문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였다.
▲ 창문 앞에 위치한 식탁. 카르투지오 수도자들은 식사를 할 때도 창 밖 하늘과 자연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하느님께 마음을 두도록 하고 있다.
수도자들은 새벽기도 후 잠시 눈을 붙인 뒤 오전 6시30분부터 일상을 시작한다. 대개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노동에 시간을 할애하며 취침에 드는 시간은 오후 7시30분부터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