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의 흔적’은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통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리치가 성리학자들에게 신학적 관점에서 이 개념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었겠지만, 기본적인 창조의 개념을 통해 하느님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일체설을 의미하는 ‘인간은 만물과 모두 하나’라는 말(有謂人於天下之萬物皆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말을 현대인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인간이 속한 창조계의 혼연일체성을 떠올릴 것이다. 환경의 중요성이 더해진 21세기에 이 말은 더욱 실감나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 말을 인간중심적 사고 위에서 생각하면, 창조계의 정점에 존재하는 인간이 자연세계와 구별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분류법에 근거하여 인간과 다른 자연실체들을 구별한다. 만물에는 성격이 비슷한 사물들이 있어 같은 무리를 이루고, 서로 다른 무리들은 ‘같은 성격’과 ‘다른 성격’으로 구별되고 모아진다. 성격이 다른 무리와 무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어서 종(種, genus)과 류(類, species)에 따라 ‘같은 종류(種類)’와 ‘다른 종류(種類)’가 생겨난다.
다시 말하면, 리치가 설명하는 만물의 구별은 인간뿐만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하느님과 만물의 관계를 존재론적 차이에서 보고자 한다. 인간과 만물의 일체성을 주장하는 성리학적 사고가 도덕적 형이상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리치의 해설은 자연철학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인간과 만물의 일체성, 더 나아가 하느님과 만물의 일체성을 거부한다. 따라서 리치는 만물, 곧 창조계를 통해서 발견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 이론을 해설하면서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된 창조계의 구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창조계가 창조주의 존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리치는 만물이 한 몸이라는 이론(萬物一體之說)을 만물이 동일한 근거에서 유래한다(萬物同根)고 해석한다.(IV-11) 만약 만물(萬物)이 한 몸이라고 주장한다면, 리치에겐 만물을 구성하는 사물들의 차이를 부정하는 게 된다. 더 나아가 리치의 생각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곧 성리학이 이해하는 오상(五常)을 행하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구별이 사라진다. 만약 만물의 차이와 구별이 사라진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받드는 인의(仁義)가 될 뿐이니(但以愛己奉己爲仁義) 남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오히려 참된 의미의 인의(仁義)를 해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자기 몸과 남의 몸을 구별할 뿐만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것도 가까운 단계에서 먼 곳으로 확충되어 나간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낳고 기르는 만물은 각자의 본성대로 절실히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뿐이다.(皆天主生養之民物, 卽分當兼切愛恤之)
그렇다면, 만물을 한 몸으로 보는 게 인의를 해친다는 게 가능한 말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용에서 언급하고 있는 군신일체(體君臣)의 태도는 무의미한 것인가? 묵자의 겸애(兼愛: 차별없이 모두 사랑하라) 사상마저 거부했던 유학자들의 만물일체의 주장은 리치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사실도 따지고 보면,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리치의 해석과 중국적 이해의 범주가 다른 사실에서 비롯된다. 리치가 따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생물계를 종(種)과 류(類)에 따라 형이하학적으로 구별하고 분류하는 게 아닌가? 결과적으로 자연철학에 기반한 형이하학적 해석은 동양사상의 형이상학적 주장을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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