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고(故) 백남익 몬시뇰을 통해 수녀회의 진출 의사를 알게 됐어요. 그때 대전교구는 원형근 주교님이 사임한 상태였고, 후임도 미정이었기 때문에 결정권자가 없어서 수녀회가 대전교구로는 진출하기가 어려웠지요. 이후 교황대사가 수원교구를 적극 추천해 수녀회를 교구로 초청하게 된 거예요.
수녀회는 교구로의 파견을 결정한 후 지동의 한 과수원 땅을 사들여 병원(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을 짓기 시작했어요. 같은 시기에 경기도청도 서울에서 수원으로 옮기기로 결정됐기에 그때는 공설운동장이었던 지금의 청사 자리에 새 청사를 짓고 있었지요. 당시 수원시장은 병원 기공식 축사를 통해 “수원시 동편에는 성가롤로병원이, 서편에는 도청이 건립되고 있다”며 “이는 수원시의 큰 발전을 보여주는 표시”라고 했어요.
당시 독일을 방문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수녀회 본부를 방문해 병원건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요. 우선 조그맣게 시작해 점차 발전해 나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확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그 당시 파다본 주교님의 의견을 따라 처음부터 마스터플랜(기본설계)을 크게 잡고 제대로 된 병원을 짓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어요. 주교님은 ‘앞으로 이 병원사업의 발전을 통해서 한국 사람들은 다 천주교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등 통이 아주 큰 분이었지요.
주교님은 처음부터 병원을 제대로 세워야 한국에서 천주교의 인지도가 높아질 것이라 판단하셨어요. 마침 지동에 적당한 과수원 땅이 나왔기에 그곳을 사서 병원을 건립하게 됐어요.
병원은 독일인 수녀님들에 의해 철저하게 운영됐지요. 그때는 관청과 교섭을 할 때 소위 급행료라고 부르는 돈 봉투가 흔히 오가는 시기였음에도 독일 수녀님들은 철저히 재정적 투명성을 지켰어요. 이처럼 탄탄한 기반이 있었기에 병원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 1967년 개원 당시의 성빈센트병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