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대 이후 조선에 전래되기 시작한 한문서학서들은 200여년 동안 조선 윻가자들에 의해 연구됐다. 특히 천진암, 주어사를 중심으로 강학회를 하면서 실학운동을 전개하던 권철신 등 남인 실학자들이 1777년 혹은 1779년 이벽의 설득으로 한문 서학서에 담겨 있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벽 이외에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천주교 신앙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때 이승훈이 1783년 동지사행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됐다. 그는 강학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천주교 교리보다는 수학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데 이벽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천주교 교리를 설명했고 이승훈은 그 설명에 감탄해 자신의 할 일을 이벽에게 문의했다. 이에 이벽은 천주교 교리를 알아보고 서적들을 가져올 것을 부탁했다.

이승훈은 북경에 가자 북당을 방문,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교리를 배운 후 입교하고자 귀국 직전 영세를 청해 베드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승훈은 1784년 3월말 책과 십자고상, 상본 등을 갖고 돌아와 이 서적들을 이벽에게 보냈다. 이벽은 교리서 등을 연구한 뒤 1784년 9월 세례자 요한으로 세례를 받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벌인다.

이벽은 효과적인 전교 방법을 고심하다가 이가환, 양근의 권일신 등 양반 학자들을 설득했고 1784년 11월 이승훈은 이벽의 집에서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벽은 또 한문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할 수 있는 중인 역관 계급을 중심으로 선교, 최창현, 김범우, 최인길, 지황, 김종교 등이 입교했으며 이들에 의해 한문 교리서들이 한글로 번역돼 천주교 교리가 일반 민중들과 여인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권일신 역시 친척과 친지들에게 선교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존창은 권일신과 김범우로부터 교리를 듣고 즉시 개종했다. 같은 무렵 전주 출신 유항검도 권씨 집을 찾아 상경, 입교해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호남지방 교회에 초석을 놓았다.

이렇게 서울에서 시작해 마재, 여주 등 경기도 일대에 전파됐던 천주교는 이벽과 권일신의 노력으로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전파됐다. 그리하여 이승훈에 따르면 1784년부터 1785년 1년 동안에 신자수가 1000명에 달했고 교세의 범위도 두루 천리에 이르렀다.

신도가 늘어나자 정기적인 신앙 집회가 이뤄지게 됐고 한국교회 최초의 정기적인 집회가 열린 곳이 명례방 장악원 앞(중구 명동1가) 김범우의 집이다. 그는 세례를 받고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해 1784년 겨울부터 정기적인 신앙집회인 「취회(聚會)」를 갖게 됐다. 집회를 가지면서 다른 지역의 공동체들과 잦은 교류를 하게 됐다. 이 명례방 공동체는 이벽의 주도하에 한국 최초의 신앙 집회를 가졌고 이러한 집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므로 명례방 공동체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례방 공동체의 예배 모습을 「벽위편」(闢衛編)을 통해 보면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서양 선교사들의 미사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만일 이벽이 거행한 예배가 「미사」였다면 1786년 봄에 이승훈이 다시 신도들을 규합해 「가성직제도」를 시행하기 이전, 즉 조선 천주교회 창립 초기부터 이승훈과 이벽을 주축으로 한 「가성직제도」가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