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심문이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당시 교회의 분열과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이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정통 교리를 재천명하고 이단 여부를 가려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설치된 법적인 제도였다.
‘종교재판’은 오역
이단심문을 논할 때 정통 신앙의 보호를 위해 사도시대부터 실행해오던 교회 목자들의 통상적인 감독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단심문은 이단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던 제도로 교회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과오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재판」으로 부르고 있지만, 이는 원어의 본뜻이나 그 내용으로도 옳지 않은 용어이다. 원어의 인꾸이시씨오(Inquisitio)는 「탐문, 심문, 조사」라는 뜻으로 이단의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의 주장이나 가르침이 그리스도교의 정통적인 가르침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심문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사실 십자군 전쟁 이후 드러난 중세의 독특한 정치·사회적인 변화와 교회 내의 부정적인 상황이 이단심문이라는 제도를 도입하게 되었으며 시기적인 특색과 심문관의 신분에 따라 「중세 이단심문」, 「스페인 이단심문」, 「로마 이단심문」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먼저 중세 이단심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중세 이단심문은 12세기말과 16세기 후반기 사이에 영국,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을 제외하고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모든 종류의 이단에 대해 적용되었는데 중세 이단심문의 대상 가운데 중세 유럽 사회에 가장 심각한 혼란을 야기시킨 이단은 카타리파였다.
중세 이단심문
카타리파는 10세기초에 마체도니아의 한 시골 사제인 보고밀(Bogomil)이 본격적으로 전파한 운동으로 이 新 마니교 이단은 비 그리스도교적인 이원론적 교리를 주장했는데 13세기초에 동방지역과 잦은 접촉을 하는 상인들과 십자군 참가자들의 왕래로 서유럽에 전파되어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그 교리에 의하면 물질세계는 참된 하느님의 창조가 아니라 다른 악신의 피조물로 보고 영혼과 물질이 결합된 모든 것을 악으로 간주하였다. 이간이 사는 현세는 악의 창조신에 의해 지배되는 곳으로 인간의 순수한 영혼도 악의 창조신에 의해 지배되는 육체와 결합함으로써 악을 저지르고 죄악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선의 창조신인 하느님은 인간이 죄악에서 해방되는 방법과 참된 고향인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그의 천사중의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파견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악의 사슬을 깨고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속을 떠나 고행하면서 죄를 짓게 하는 나쁜 물질과 접촉을 금해야 한다. 그래서 결혼, 성교(性交), 육식(肉食), 물질, 재산의 소유 등도 바로 인간을 죄짓게 하는 나쁜 물질이기 때문에 「완전자」는 이것들을 배척해야 한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결합의 성사로 보는 혼인도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악을 낳게 한다고 배척하였다.
선-악 이원론 교리
그리고 자기 교도들의 일부만이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으로 생활하며 다른 사람들은 완전한 자들로부터 「위령안수예식」(Conncolamentum) 받기를 희망하며 생활해야 한다면서 물질적이고 가견적인 것을 거부하므로써 교회로부터나 사회로부터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배타적인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가난하고 재물의 소유를 배척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인이라 자처하였다. 당시 유럽은 반종교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고 교회는 많은 부(富)를 누렸으며 세속적인 권력과 명예를 탐하는 성직자들이 많아 교회의 쇄신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카타리파의 주장은 복음적이고 청빈적인 교회를 꿈꾸던 많은 급진적인 개혁가들에게 호의적인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순박한 민중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금욕주의 이상형으로 보이면서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하였다.
급진적 주장에 추종자 몰려
그들은 교회식으로 단체를 만들고, 교계제도와 교구제도를 만들었다. 교회를 사탄의 회당으로, 사제를 위선적인 죄인으로, 성사(聖事)를 마귀의 산물로, 황제를 사탄의 대리자로, 제후를 사탄의 조수로 규정하였다. 카타리파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종교적 기반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기반까지 공격하였으므로 국가와 교회는 그들을 공동으로 대항해야 했다.
1167년 뚤루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까라망(Caraman)의 성 펠리스에서 많은 「완전자」들이 참석한 카타리파의 대공의회가 열려 이원론적인 교리를 재천명하였다.
몇 십 년 동안 교회는 이단의 확산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는데 우유부단한 상태였다. 처음에 교황은 이단을 소멸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소송 방식을 적용하도록 촉구했고, 다음 단계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동원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폭넓게 시 당국의 개입에 의존하면서 이단자 색출에 보다 구속력 있는 수단을 적용해야 했다.
1184년 베로나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 루치오 3세와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 1세 황제가 이단의 확산을 막고 근절시키기 위해 이단심문의 필요성에 합의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1197년 아라곤왕 베드로 2세는 카타리파를 국적(國敵)으로 선언하고 그들의 화형(火刑)을 명하였다.
카타리파를 國敵 단죄
그러나 주교가 주도하는 이단심문은 이단적인 선전에 아주 미약하게 대응하였다. 이단의 확산을 막기 위해 처음에는 시토회에, 그리고 1206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도미니코 성인에게 설교 임무를 맡겼지만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마침내 1208~1212년에 카라티파에 속한 알비파에 대항하는 제1차 십자군 운동이 일어나 군사력을 남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이단자들을 고립시키는데 별 효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점령된 지역의 주민들의 일부가 교황청을 거슬러 봉기하기까지 하였다.
이제 카타리파는 단순한 사상 운동에서 벗어나 반국가적, 반사회적, 반그리스도교적인 위험 수위를 한층 더 높여 정치적인 세력 집단으로 바뀌어 국가와도 투쟁하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프란스 남부 알비(Albi) 지방에 유포되어 프랑스 왕권을 반대하여 투쟁에 나선 권력자들과 손을 잡게 되면서 20여년간 정치와 종교가 혼합된 유혈 참극의 알비파전쟁(1209~1229년)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단들의 정치세력화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당시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이단을 억압하는 기구가 법적 제도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단자들을 억압하는 법적인 기준을 마련하였고, 1224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이단자들을 화형으로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교황 호노리오 2세는 묵시적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교황의 위임으로 비상위원회가 모든 교회당국에 설치되어 성직자, 평신도, 시미어는 죽은 사람까지도 법정에 소환되는 등 비정상적인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하였다. 사형집행이 적용되고, 866년 니콜라오 1세 교황이 단죄한 바 있는 법적으로 허용된 고문을 다시 적용하고, 자녀들에게까지 연좌제를 적용하여 불명예스러운 벌을 연장하는 등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이러한 난폭한 대응은 위험에 직면한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로마법의 영향으로 대역죄의 차원에서 정당화하였다.
한편 사절들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단을 근절하려고 성급하게 나설 때 교황들은 이단심문에 의한 억압을 완화시키도록 하였음에도 반 교회적인 범죄 추적과 이에 상응한 처벌이 점점 과격하게 법제화 되기에 이르렀다. 만일 교회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개인적인 복수와 시 당국으로부터 보다 냉혹한 억압에 넘겨져 더욱 참혹한 혼란을 초래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1238년 6월에는 회개한 모든 이단자들에게 정통 교리가 설명되는 15일 혹은 30일 기간의 소위 「은총의 때」를 도입했고 이 교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이단자들에게는 폭넓은 용서를 약속하였다. 사형 벌은 참회하지 않는 자와 재범자의 경우에 한정했다. 그 외에는 순례, 기도, 불명예스러운 표지와 같은 가벼운 벌이나 유기징역 혹은 종신징역과 같은 큰 벌이 선고되었으며 이단이 적극적으로 자기 교리를 주장하거나 공적으로 드러낼 때에만 기소되었다.
무고한 희생자 양산
그러나 직업적인 포악한 형리들의 잔인한 처형은 그 한계를 모르고 무죄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가져왔다. 사랑과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한 자비로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분별한 광신자에 의해 저질러진 과오는 복음의 가르침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당시 종교적인 이단자는 정교일체주의(政敎一體主義)적인 사회에서는 동시에 왕권에 도전하는 반역 죄인으로 드러났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신학자들은 신앙의 직접적인 강요를 완전히 거부하였지만, 이단을 내세워 교회와 국가를 동시에 폭력으로 전복하려 할 때 교화적인 대처 방법은 무엇일까?
성왕(聖王) 루이 9세처럼 중세인들은 진리를 수호하고 신앙을 위한 봉사에 더 효과적이고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앗던 것 같다. 그리고 루터와 멜란톤, 특히 칼빈 같은 16세기 종교 개혁가들도 그러한 생각으로 이단자 심문과 마녀 재판을 강행했는데 근세까지 독일의 비텐베르크와 제네바에서 행해졌고 18세기에 비로소 계몽주의가 폐지하였다.
18세기 계몽주의에 의해 폐지
사실, 각자의 양심에 입각한 의견 자체로는 처벌받지 말아야 하고 외적인 표현이 사회를 거슬렀다 할지라도 인간 각자와 개인의 양심을 더 많이 존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단심문이 강행되던 동시대 인물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신앙의 순수성을 전승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하나의 바람직안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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