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오늘과 같이 부활 다음 주일이 되면 으레 우리는 미사 때에 부활하신 주님과 토마 사도의 만남에 관한 대목을 복음으로 듣는다. 이 대목이 오늘 읽혀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복음말씀 가운데 나오는 『(부활하신지) 여드레 후에』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오늘 주일 복음의 대목이 들어있는 요한 복음서의 다른 대목에 의하면 토마는 한 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감이 들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 용감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예수님께 대하여 굳은 확신을 갖고 있던 제자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복음을 보면 이토록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토마가 「철저한 냉담자」가 되어 나타난다. 그는 동료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다고 분명히 증언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상흔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그분의 부활을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단언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 예수님께 걸었던 희망이 그토록 컸던 만큼, 참혹한 그분의 죽음이 주는 충격도 그만큼 그에게 컸던 것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열렬했던 그의 믿음과 희망이 어이없게도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토마가 이런 상태에 있었을 때, 즉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 좌절과 불신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를 찾아오시어 당신의 「십자가 상처」를 만져보도록 하신다. 못 믿겠다며 마음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는 토마에게 「십자가에 달리셨던」그의 스승 예수님이 다가가시어 「평화」를 선사하신다. 예수님의 이런 다가오심 자체가 이미 토마에게는 「놀라운」주님의 사랑 표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가 오셨을 때, 토마는 예수님께 대한 모든 희망을 거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스승을 배반한 제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도무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던 상태였다. 사실, 스승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때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분이 고통스럽게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체포했던 「유다인들이 무서워」도망갔던 것 아닌가? 이런 토마의 비겁함, 불충실함 그리고 불신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토마에게 다가오시어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주신다. 예수님께서 토마에게 하시는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와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도 질책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십자가의 충격」때문에 잘 믿지 못하는 토마를 안타까워하며 하시는 격려의 말씀이요,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의 행복」으로 부르시는 초대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주님의 이런 사랑을 접하게 되자 그 동안 얼음같이 차가웠던 토마의 불신이 봄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토마가 드디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고백한다. 사실, 이 고백이 뜻하는 엄청난 내용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 해서 파악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을 할 때 토마는 이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차원을 넘어서 『보지 않고도 믿는』차원으로 넘어서 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해 토마는 보고 만짐으로써 다시 믿게 되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다가오신 부활하신 주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믿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 사도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의미의 부활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죽었던 토마의 믿음을 부활시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은 죽음도 두려움도 의심도 절망도 넘어서서 토마에게 다가가 그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 사도의 이이기가 많은 분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또는 주변 사람들이 토마처럼 깊은 신앙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가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말 마음 아프게도 우리 주변에는 한 때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이 어떤 「충격적인 일」을 겪은 후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마저도 잃고 완전 「냉담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토마 사도의 이갸기는 그런 분들에게 선포되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기쁜 소식」의 출처와 근거는, 언제나 그렇듯이, 주님의 사랑에 있다. 그분들이 토마가 스스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던 처지에 있었을 때, 주님께서 사랑과 용서로 다가오시어 그를 그 불신과 좌절의 늪에서 건쳐내셨다는 오늘 복음말씀을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도, 무덤도, 굳게 닫힌 문도 주님의 사랑의 길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마음에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한편 토마 사도 이야기는 토마와 같이 믿음의 어려움을 겪고 잇는 사람들을 신앙공동체가 관용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것도 말해준다. 그리고 토마와 같이 신앙의 여정에서 「좌절하거나 냉담한 사람들」이 신앙을 되찾는데 있어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며 사는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라는 것도 말해준다. 신앙공동체(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현존을 깊게 체험하며 서로 사랑하고, 특히 「좌절과 고통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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