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생각하면 「가난」이 자연스럽게 우리 머리에 떠오르듯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언급하게되면 즉시 「기도」가 연상된다. 실로 아빌라의 데레사는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는 심오한 기도 체험과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완벽한 묘사 등으로 학계 뿐 아니라 교도권으로부터 기도신학의 탁월한 권위자로 인정되었고 「교횡의 박사」로 선언된 분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데레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기도생활의 큰 귀감으며 출중한 스승이다. 기도할 줄 안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인 동시에 인간 협력의 결실이다. 따라서 「기도의 사람」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면서 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레사는 어떻게 기도의 사람이 되었을까? 먼저 그녀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생애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아버지 알론소 산체스와 어머니 베아트리스 사이에서 열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신앙심 깊은 어머니로부터 기도를 배웠고 좋은 성모신심을 물려받았다. 데레사는 당시 귀족 자녀들이 하던 대로 아주 어릴때부터 읽기를 배웠다. 그녀는 형제들과 함께 성인전을 읽었고 그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특히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 중엔 가슴 설레곤 하였다. 데레사가 겨우 일곱살 때 오빠 로드리고와 함께 순교의 열망 때문에 구걸하면서 무어인의 나라를 찾아나선 일이 있었다.
데레사는 나이가 좀 들면서 그녀의 마음에 어렸을 때부터 싹터오던 하느님게 대한 절대적 사랑의 소망이 점점 사라지고 어머니의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기사 소설을 읽는데 열중하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몸단장하기에 바빴고 한편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멋진 기사가 나타나기를 꿈꾸었으며 「아빌라의 기사」라는 제목으로 서설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한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아버지 알론소는 그녀를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맡겨 그 연인으로부터 격리시켰다. 그 수도원에서 근 일년간 살면서 영원한 행복에 대한 소망이 싹트는 것을 느꼈으나 수도생활의 소명을 의식하진 못했다. 그녀는 중병에 걸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그녀의 나이 열 여덟 되던 1532년이었다. 그러나 1535년 11월 2일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생활을 선택하여 강생의 갈멜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이로써 데레사는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데레사의 기도생활의 발전에 중요 계기를 이루 누것은 숙부로부터 받은 한 권의 책을 읽게 되면서였다. 그 책은 오수나 수사가 쓴 묵상방법론 「초보의 제 삼부」였다. 오수나의 묵상 방법에 따라 열심히 잠심하였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신비체험을 하였다. 하느님은 그녀의 마음 속 깊이 그분의 현존을 느끼게 하시어 그분께 대한 사랑에 그녀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도록 이끌어 주셨다.
데레사는 수도원 응접실에서 소임을 하던 중 그녀의 아름다움과 기지있는 말솜씨에 매료된 귀족 한사람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인간적 욕구 사이에 헤매면서도 수도회 규칙을 충실히 준수하고 있으므로 수도생활의 본질적 조건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녀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세속을 향한 인간적 마음의 갈등 속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러면서 약 일년 동안(1543~1544) 묵상기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내적인 싸움 중에 그녀의 고백 대로 「약」을 찾으면서 많은 영적 서적들을 읽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영적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고백록」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이야기가 씌여진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이 영예로운 성인에게 나를 도와주십사고 부탁했습니다』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하나의 사건이 그녀의 회심을 마무리짓도록 했다. 그것은 기도실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영혼의 밑바닥부터 뒤흔들리는 듯한 강렬하고 경건한 열정을 느끼면서 한편 격심한 슬픔에 짓눌리면서 회환(悔恨)의 눈물을 금할 길 없었던 것이다.
충격적인 이 두 사건은 데레사를 그녀의 생애의 3단계로 들어서도록 하였다. 그녀의 영적 향상의 출발점은 이 두 사건을 통해 자신의 비참함을 마음속으로부터 자각한 데 있었다. 그녀는 묵상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한편 그녀는 여전히 세속적인 우정을 보존하고 있었기에 고독은 아직 불완전한 것이었고 또한 그녀가 받은 신비적 은혜에 대한 분별문제로 고민해야 했다. 그녀가 자신의 영적 상태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알기 위해서 충고를 얻으려고 결심했다. 교회의 가르침에 자신의 체험을 비추어보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식별력 있는 사제들을 찾아 고해성사를 보고 영적 상담을 하였다. 일부 사제들은 신비적인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적절히 조언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세티나 디에고, 프라다노스 요한 등 예수회 신부들은 그녀 안에 성령이 활동하고 계심을 보증하면서 용기를 주었다.
데레사가 비약하는 데에 장애엿던 마지막 끈은 그녀의 회심으로부터 일년 이상이 지난 1556년 성령강림대축일에 끊기게 되었다. 『오소서 성령이여…』를 읊으면서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프라다노스 신부의 권고에 따라 묵상기도 후 그 시도를 시작하자 그녀는 탈혼 상태에 빠지면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이 최초로 경험한 탈혼이었다. 데레사는 이 체험으로 드디어 마지막 신비적 단계에 들어서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마흔 하나였다 .1559년 6월 29일 그녀는 최초로 그리스도를 보는 지적환시의 은혜를 받았다. 그후 그녀는 거듭 환시를 체험하면서 그리스도를 보았다., 내적으로 더욱 굳세어지고 불타는 듯한 하느님의 사랑에 싸여 이제는 그녀의 남은 평판 같은 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1560년 4월 그녀가 신비적 상태에 있을 때 심장의 「상처」라 표현하는 은혜를 받았다. 즉 천사의 화살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 듯한 체험이 몇 차례나 거듭 일어났던 것이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영적인 고통이었는데 육체도 어느 정도로 그리고 때로는 심한 정도로 아픔을 느꼈다. 이러한 특별한 표징은 가끔 여러 사람들 앞에서도 일어나곤 했는데 박해자들은 그녀가 심한 통증을 느끼는 것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여 그 빌미로 더욱 그녀를 괴롭혓다.
1560년 9월 어느날 데레사가 몇 명의 친구들과 대화하던 중 알칸타라의 베드로 수사가 개혁한 맨발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생활 방법을 모방하여 가르멜의 원시 회칙을 지키는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자는 하나의 제안을 받았는데 그것이 그녀의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그녀가 더 엄격한 생활을 소망해 오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 후 개혁 수도회 창립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데레사는 주변의 많은 반대와 큰 장애들로 인해 곤경을 겪었지만 불굴의 용기로 그것을 극복하여 결국 1567년 2월 가르멜회 총장 잔 밥티스타 로씨 신부로부터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창립 인가를 얻어냈다. 그리고 1568년 11월 28일엔 아비랄의 두루엘로에 남자 가르멜회 첫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그후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 15년 동안 끊임없는 개혁 활동을 하며 수도원을 세웠는데, 여자 수도원이 열일곱, 남자수도원이 열 다섯이나 되었다.
1572년 11월 16일에 데레사는 「영적 혼인」이라는 은혜를 받게 되는데 이로써 그녀는 신비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로 넘어섰다. 여태까지 미완성이었던 그녀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이제 완결되어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데레사는 수도회 개혁자인 동시에 탁월한 신비신학자이며 훌륭한 영성가였다. 그것은 그녀가 쓴 저서들 안에 잘 나타나고 있다.
데레사는 1582년 10월 4일 알바 드 도르메스 수도원에서 시편 50편을 읊고 묵상기도 속에 잠기면서 영혼을 하느님께 돌려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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