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5만평.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사용하고 있는 땅의 규모다. 인구 1000만이 넘는 서울시 면적의 절반이자 인천의 1.5배에 해당하는 이 땅을 우리나라는 96곳에 주둔하고 있는 3만6000여명의 미군을 위해 단 한푼의 사용료도 받지 않고 내놓고 있다. 12조원(96년 국방부 백서)이 넘는 금사라기 땅을 사용하고 있는 미둔의 역할에 기대를 걸면서.
『미군은 한국의 영토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한국은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법적 근거가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주된 내용이다. 1953년 10월 1일 조인된 이 조약에 따라 미국이 군대를 한국에 주둔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한국은 이를 인정해야만 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제4조에 따라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체결한 것이 「한미 행정협정」이라고도 불리는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 Status of Forces Agreement)이다. 그러나 「한미 행정협정」이라는 명칭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국가 대 국가가 아닌, 한국과 미 행정부간의 협정이라는 미국 정부의 시각이 전제된 것이어서 우리나라로서는 굴욕적인 표현이다.
1967년 2월에 발효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성은 이미 미국마저 인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국제법상 외국군대는 주둔하는 나라의 법률질서를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에게 지구촌 시민으로서의 염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없는 듯 보인다.
그 좋은 예가 범법행위를 저지른 미군에 대한 재판권 행사문제다. 우리 사법부에 대해 미군측이 재판거부권을 행사하거나 미국 당국이 요청하면 한국은 재판권을 포기해야 한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일본 독일 필리핀 등의 국가에 비교한다면 우리는 주권을 포히갰다고 할만하다.
미군범죄에 대해 각각 52%, 32%, 21%의 재판권을 행사하고 있는 북대서양 조약기구나, 일본, 필리핀 등 다른 미군 주둔지역에 비교해 85년부터 98년까지 불과 1.7%(법무부 통계)의 재판권을 행사한 우리나라에서 주한미군은 아예 치외법권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미국과 주둔군지위협정을 맺고 있는 셈이다. 미국과 주둔군지위협정을 맺고 있는 전세계 85개국가 중 미군이 이같은 권리를 누리고 있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지난 3월 독일 주둔 미군 군속의 10대 아들들이 고속도로 다리 위에서 장난 삼아 돌을 떨어뜨려 운전자 2명을 숨지게 한 사건의 처리과정은 우리의 경우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독일 경찰은 5000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범인을 찾았고 잡힌 3명의 소년들은 독일 교도소에 구금돼 최고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일 미군기지의 75%가 밀집해 있는 일본 오키나와에서 지난 95년 미군의 소녀 폭행 사건으로 미·일간에 한동안 흘렀던 냉랭한 기운은 중범죄의 경우 기소 전에 신병을 넘기도록 하는 등 미군으로 하여금 많은 특권을 포기하게 만든 좋은 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한국인은 여전히 미군들에게 열등국민이어서 함부로 대해도 좋은 존재들이다.
일례로 SOFA 제23조는 미군이 공무집행 중에 우리 국민에게 가한 손해에 대해 한국 정부로 하여금 한국국민이 낸 세금으로 미군배상금의 25%를 분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종주국이 식민지에서나 행할 행동을 미군은 너무도 당연하게 행하고 있다. 헌법상 대통령이 갖게 돼 있는 군통수권을 한미연합사령부의 사령관인 주한미군 사령관이 장악하고 있는 오늘, 과거 식민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상황이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다.
「SOFA 개정 국민행동」(상임대표=문정현 신부) 김종섭 사무국장은 『반세기가 넘게 흘러 한반도의 상황이 과거와 많이 달라졋음에도 불구하고 50년전 냉전 논리가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 것이 SOFA』라며 『새로운 세기를 맞아 50년 동안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해 주둔해오고 있다는 미국의 논리와 역할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때』라고 밝혔다.
1996년 9월 미국측의 일방적 협상 중단 이후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SOFA 개정협상이 재개된다. 안정적인 양국관계에 장애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의 여론이 높아지자 4년만에 한자리에 앉게 되는 한·미 당국, 그러나 마국측의 시혜적인 태도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논의 안건도 미군 피의자의 신병 인도시점을 현행 「판결확정 후」에서 「기소와 동시」로 앞당기는 문제 등 본질적인 문제에서 비껴선 부분에 국한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동반자적 관계가 아니라 시혜적인 미국의 자세가 바뀌지 않는 한, 군사안보 논리와 경제논리를 접고 주권국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일제 36년의 식민통치는 완전히 벗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실일 뿐이다.
이야기 하나
시대는 1400년대 조선. 봄기운이 젖어 종로통 뒷골목에 자리잡은 기생골목을 무심코 들어섰던 왕십리 김서방. 마흔줄의 김서방은 이날 일로 두고 두고 화병을 앓아야 했다.
기생놀음에 젖어 있었던지 대낮에 기생집을 나서던 명나라 사신과 우리나라 벼슬아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본 것이 화근이었다. 기분이 나빠진 명나라 사신이 벼슬아치에게 몇 마디를 건네자 벼슬아치는 수행 관군에게 다시 말 마디를 던졌고 김서방은 그 자리에서 인근 포도청으로 끌려가 물볼기를 맞고 나왔던 것이다.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출세해야 돼』. 네 아들을 앉혀놓은 김서방의 한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어졌다.
현실 하나
2년전 결혼해 지난해 첫 사내아이를 얻은 김씨. 평범한 회사원인 김씨가 어이없는 일을 당한 것은 지난 99년 5월 용산구 이태원동 1백화점 근처.
아내와 아들을 차에 태우고 교외 나들이에서 돌아오던 김씨는 갑자기 끼어든 사람 때문에 핸들을 꺾는 바람에 아내가 다치고 차가 파곤되는 피해를 입었다. 차에서 내려 가해자에게 따지려고 다가갔던게 문제였다. 김씨는 미군의 자녀인 지미(19·학생)와 에릭(15·학생)으로부터 주먹과 맥주캔으로 얻어맞아 코뼈가 부러지는 전치 3주의 중상을 입었다.
두 미군 가족은 피해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약식기소돼 가벼운 벌금형을 받았고 김씨는 미군측으로부터 소파(SOFA)에 의한 배상이라는 말과 함께 50여만원의 배상통지서를 받았다. 사고로 입원한 아내의 병원비는 고사하고 차에 대한 변상에도 못미치는 돈을 배상비라고 받으라는 소리에 울화가 치민 김씨는 다른 방법을 찾다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소송 1년여, 문제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김씨는 화병만 얻을 지경에 이르렀다. 가해자이면서도 너무도 당당하기만 한 미군. 김씨는 자신이 한국에 살고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이야기 둘
80년대 중반, 한-미 합동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훈련이 펼쳐지고 있는 경북 영일만 ㅅ면.
『쪼코레뜨 기브 미』한달이 넘게 펼쳐지는 훈련기간 동안 ㅅ면을 비롯한 인근 마을의 꼬맹이들이 미군의 차량들을 따라 다니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내뱉던 말. 아이들에게 미군들이 던져주는 껌이나 초콜릿은 행운의 상징이었다. 더구나 운이 좋아 미군이 먹다만 시레이션 박스를 얻어든 녀석은 두고 두고 자랑을 하고 먹고 남은 깡통을 전리품인 양 한동안 보관하곤 했다.
아이들에게 미군을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든든한 평화의 수호자였으며 지선(至善)의 상징이었다.
『나도 크면 미군에 들어가야지』아이들의 소박한 꿈은 가난한 현실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양 생각되었다.
현실 둘
동두천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군속 조아무개씨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며칠 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퇴근을 해 잠시 휴가를 다녀왔던 조씨, 그는 출근해서 전 부대원 500여명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부대를 보고 망연자실해졌다.
올 1월 「파주 폭발물 사태」로 드러난 미군의 이중적 태도. 민간인 보호를 외면하고 미군만을 철수시켜 물의를 빚은 이 사건은 평화를 위해 한국에 왔다는 주한미군의 주장을 무색케 하기 충분했다.
지난 반세기동안 미군이 한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다는 명분은 한갓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또한 이같은 일이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미군부대 덕(?)에 연명하는 군속과 인근 주민들은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거짓말 같은 사실 하나
매화 향기가 짙던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매향리 마을.
1951년부터 미군 폭격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해 50년째 매년 250여 일에 걸친 미공군의 폭격 연습이 이어지고 있는 매향리에서는 이제 매화조차 찾아볼 수 없다. 하루에도 700여회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 미군의 기관포와 기총사격, 레이저포 등의 폭격연습으로 주민들은 정신적인 충격은 물론 생명에 대한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오폭사고로 지금까지 죽거나 다친 이들만 30여명. 그러나 미군은 물론 우리 정부마저 아무런 대책없이 방치해오고 있다.
마을 앞 바다에 있던 섬들도 두 개를 제외하곤 폭격으로 모두 사라져버렸고 그나마 남은 두 개의 섬도 크기가 3분의 1로 줄어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됐다. 전투기의 저공비행과 폭격으로 인한 소음은 국제적으로 주거불능지역으로 정해진 90데시벨을 훨씬 뛰어넘는 80~150데시벨 수준에 달해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미군측은 오히려 실전과 같은 훈련을 이유로 200여 세대 800여명의 주민들의 이주를 반대하고 있다.
SOFA를 이유로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는 미군과 이를 방조하고 있는 정부, 이들의 존재이유는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거짓말 같은 사실 둘
34명. 지난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미군 956명 가운데 우리 경찰과 검찰에 의해 수사받고 재판을 받은 미군 숫자. 단 3.5%에 불과한 수치다. SOFA에 따라 미군측의 요청이 있으면 한국측은 재판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미군 피고인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 우리 검찰은 항소도 할 수 없다. 항소권은 미군에게만 주어져 있다.
지난 2월 서울 이태원 외국인 술집 종업원을 잔인하게 살해한 미군은 한국인의 경우 당연히 구속수사를 받아야 할 강력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구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 영내를 오가며 몇 차례의 수사만 받았다.
피해자인 우리 국민의 인권과 기본권을 침해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하는 미군의 인권은 우리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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