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경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분을 틈타 침입한 이슬람교도들에게 정복당하여 15세기까지 약 500여 년 동안 이슬람교 세계에[서 정교양권(政敎兩權)을 장악한 칼리프의 통치를 받아왔다. 따라서 스페인의 중세 역사는 이슬람 세력의 지배로부터의 국토 회복 운동으로 점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영토 회복운동
15세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영토회복 운동으로 인해 여러 왕국들이 동부의 아라곤 왕국과 서부의 카스틸랴 왕국으로 통합되었으며, 1479년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2세 국왕과 카스틸랴의 이사벨라 여왕과의 결혼으로 에스파이나의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 여세를 몰아 1492년 그라나다 함락과 함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영토회복에 성공하여 가톨릭 신앙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이베리아반도에 남아 있던 아랍인들을 완전히 재정복한 스페인은 정치, 종교, 민족적으로 철저한 일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1516년 이후 합스부르크家의 지배가 시작되자, 펠리페(Felipe) 2세 국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스페인에 절대주의가 확립되어 왕권에 도전하거나 이제 막 이루어놓은 반도의 통일과 일치를 저해하는 일체의 분파적 행위를 철저히 근절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정책으로 삼았다.
일반적으로 유럽에서 경제적인 자유 이외에는 시민의 권리를 전혀 인정받지 못한 유다인들은 자연히 경제활동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그들의 경제적 수완은 본토인들로부터 질시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1290년에, 프랑스에서는 1314년에 유다인들이 추방되었고 스페인에서는 1391년에 유다인 박해가 시작되면서 6월 6일부터 8월 13일까지 유다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빈첸시오 페레리 성인 같은 설교가들의 설교 덕분으로 자의로 개종하고 일부는 죽음과 개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민족갈등 이단심문 도입 토대
이러한 민족 차별적인 갈등은 스페인 이단심문을 도입하게 된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 갈등이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인들 사이의 대립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카스틸랴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갈등이 순수하게 교리적인 이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혐의자들에 대한 단순한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한 부유한 기업가들이었던 유다인들과 아랍인들이 여전히 유다교 신앙이나 이슬람 신앙을 비밀리에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고발되면서 순수한 스페인 혈통의 가톨릭 구교도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자주 정치적으로 혐의를 받고 국가의 안정에 혼란을 가져오는 간첩으로 간주되어 스페인 본토인들로부터 대역죄인처럼 취급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종교적인 단일성의 바탕에서 민족주의적인 국가의 일치를 모색하는 당국에 위협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스페인의 국왕들은 단순한 승리에 머무르지 않고 철저하게 정복하므로써 이베리아 반도에서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따라서 500여 년 동안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다가 국권을 겨우 회복한 스페인에서의 이단심문은 국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관계로 서유럽의 여타 국가의 이단심문과는 그 성격이 다소 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수한 카스틸랴의 가톨릭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국가적이고 이념적인 적으로 간주하였으며 15세기 말에는 스페인 혈통 순수성의 원칙에 입각한 보호 위원회가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政敎一致 지향 이단 단죄
초기에 주교들은 이단심문의 비 복음적인 방식에 반대하였지만 가톨릭 신자인 왕들은 종교적인 일치와 국가적인 일치를 동일하게 생각하고 이러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그들의 사명으로 생각하였다.그래서 1478년 아라곤의 국왕 페르디난도와 카스틸랴 여왕 이사벨라가 종교적인 일치를 확실하게 보장하려는 목적으로 실지로는 이미 폐지되었던 이단심문을 다시 부활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교황 식스도 4세(1471~1484)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시빌리아에서 시작한 이단심문이 처음에는 유다교와 이슬람교로부터의 개종자들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후에는 프로테스탄트 문제에까지 확대하여 실시되었다.
이단심문이 실시되자마자 교황청의 지침을 무시하면서 카스틸랴 뿐만 아니라 아라곤, 까딸로냐, 발렌자 지방에서도 잔인하게 시행되자 1481년 교황은 이에 항의하였고 1482년 1월과 10월에 교서를 발표하여 왕립 이단심문에 주교가 통제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하고 로마에 항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주 정치하에서 자행되던 이단심문은 교황의 항의에 어떠한 후속조처도 하지 않았고 교황은 그들의 강요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스페인 이단심문이 국가적인 이단심문으로 제도화되었고 이를 완화하려는 교황청의 중재 노력을 별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식스토 4세 교황은 후에 이사벨라 여왕에게 사법권을 가진 스페인 전역의 이단심문 총책임자를 임명하도록까지 허락하였다. 1483년 여왕에 의해 이단심문 총책임자로 임명된 도미니꼬회원인 토마스 또르꿰마다(Tommaso Torquemada, 1420~1498)는 능수 능란한 관리자로서의 수완을 발휘하며 이단심문을 1498년까지 독재적으로 운영하였다. 이단심문과 관련하여 선고된 참수형이 2천여 명에 달한다고 하나 근래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 숫자와 처형의 실상이 많이 과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1492년 이후 왕립 이단심문은 유다인들을 억압하는 근거가 되고 그들에 대한 대중적인 증오심을 고무시킨 민족주의적 원칙들을 법제화 하였다. 이때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하기를 원하지 않은 약 20여만명의 유다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야 했다. 이 이단심문의 출현은 스페인 북부에서 오랫동안 저지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또르쮀마다의 재판관들에 대한 저항은 순수하게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옛 지방 도시들이 행사하였던 독자적인 법, 즉 피고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적인 기본법에 반하는 불공평한 소송과 관련된 투쟁이었다. 아라곤의 국왕 페르디난도가 자기의 권위를 행사하려고 시도하였을 때에도 북부지방은 이단심문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르첼로나 지방은 이단심문 위원회를 추방하고 사라고자 지방에서 아라곤의 이단심문관인 베드로 아르부에스(Pedro Arbues)가 살해되었다.
본래 가치·순수성 상실
시빌리아 등 다른 지역에서는 소위 「신앙의 판결」(Autos da Fe)이라는 이단심문판결 선고 의식을 성대하게 치르며 공적으로 잔혹하게 실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비복음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단심문은 신앙의 순수성과 관습의 권위에 봉사하고자 하였던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고 세속적인 험담과 시기, 질투에 의한 고소, 고발로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희생시켰다. 이단심문기관의 상·하위직을 막론하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무패하여 권한을 남용하였다고 한다. 1569년부터 1571년까지 모슬렘 교도들인 무어인들의 반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후 그들 중 일부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지만, 대부분이 이슬람 신앙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의심받으면서 1609년부터 1610년까지 무어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16~17세기에는, 기도로써 宗德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光明宗派(Alumbrados)인들,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한 몰리나(Luis de Molins 1536~1600년)의 몰리니즘(Molinism) 이단, 마녀, 피적인 개종자들의 신성모독죄,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이단심문에까지 확대되었다.
물론 교황들과 주교들이 이단심문제도에 항의하였지만 국가적인 제도로 실시하는 왕들의 주장을 누그러뜨리는데 실제적인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또 실제로 가톨릭 왕들의 요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효과적인 반대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후원하는 것이 아메리카 대륙을 그리스도교화하며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위협을 억제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교적인 다른 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원래의 국권을 회복한 스페인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실시해온 이단심문이 18세기까지 유지되다가 1808년 요셉보나파르트에 의해 폐지된 후 1814년 다시 부활되어 1826년 理神論者인 가에따노(Gaetano Ripoll)가 이단심문으로부터 교수형으로 단죄된 것이 스페인과 전 세계에서 마지막이었고 1834년 7월 15일에 스페인 이단심문이 결정적으로 폐지되었다. 가톨릭교가 스페인 국가주의적인 정책에 순응하면서 그 신앙의 가치와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초래하게 되었다.
1834년 이단심문 폐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면에서 온전히 획일적인 통합의 기반에서 통치하던 그 시대적 상황을 모든 면에서 다변화된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도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평가는 자연히 오늘날의 정신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그 시대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자문자답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순수 혈통의 민족주의적 개념이 보편적인 가치와 하나의 지구촌 가족을 지향하는 그리스도교적인 정신과 양립할 수 있는가? 한 국민이 자기 조국에서 주인 행세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상인 일이 아닌가?』
비록 왕이 이단 심문관을 임명하여 군주의 의사에 종속되어 운영되었지만 교황이 인가하고 그 일부를 파견하였기 때문에 이단심문과 연관된 교회의 과오는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특수한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교회의 복음 정신에서 벗어나 기회주의적으로 「시대의 권력」에 순응할 때, 교회의 소중한 신앙적인 힘은 약화되고, 오히려 불의에 야합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도 값진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단심문의 사례는 교회가 복음의 누룩을 받아들이고 복음의 힘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시대적인 풍조에 휩쓸려 인간적인 이해타산으로 제도의 편리성에 의존하면서 볻음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포기하고 그 시대의 비복음적인 사회에 어울려버릴 때 교회제도가 어떠한 말로를 가져왔는지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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