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추기경은 대담을 통해 “사제생활 50년을 뒤돌아보면 하느님께 감사하고 송구한 마음뿐”이라며 “그분 제자로 살아가는 데 있어 많은 부족함이 있었음에도, 하느님께서는 분에 넘치는 과분한 사랑을 주셨고, 그 은총에 감사하다”고 금경축을 맞는 소회를 밝혔다. 정 추기경은 사제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청주교구를 떠날 당시 교구 사제수가 106명을 돌파, 교구장 부임 때 교구 사제가 100명이 되게 해달라던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이라고 떠올렸으며, 외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에 가고자 하는 아들의 뜻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던 어머니를 회고하면서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정진석 추기경과 이성도 사장 신부의 대담은 지난 4일 오전 11시 추기경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 일시 : 2011년 3월 4일
■ 장소 : 서울대교구청 추기경 집무실
■ 대담 : 이성도 사장신부
▲ “과분한 사랑을 분에 넘치게 받았다”고 말하는 정진석 추기경은 “지난 50년 동안의 사제생활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참 송구스럽습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정진석 추기경 (이하 정 추기경) : 사제서품을 통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그 말씀대로 살고자 땅에 엎드려 약속드렸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는 척’, ‘그런 시늉’만 한 것 같아요. 모든 것을 버리는 척 했지만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앞에 송구스럽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는데 무엇을 받겠습니까” 했을 때 “내 이름 때문에 형제, 부모, 자녀,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로 받을 것”이라 하셨던 것처럼 제게 백 배의 상을 덥석 다 주셨어요. 그 상을 지난 50년 동안 매일 받으면서 살아 왔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겠다고 맹세했었지만 주님은 늘 짊어질 만큼의 십자가를 주셨고, 무겁다는 생각이 들 때는 그 십자가를 함께 짊어질 수 있도록 유능한 보조자를 반드시 보내 주셨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무겁다고 자각하지 않도록 늘 도와주신다’는 신념을 매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는 신념으로 일생을 사셨는데 저는 그 아브라함의 신념을 실감하면서 살았습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내적인 힘듦이나 ‘십자가를 혼자 지는 건가’ 하는 고독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기도해 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정말 과분한 사랑을 분에 넘치게 받았습니다. 지난 50년 동안의 사제생활은 이렇게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참 송구스럽습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 신부 : 사제로 살아오신 삶만 50년, 그리고 그 준비기간, 또 그에 앞서 어린 시절 주님을 알게 된 시간까지 따지면 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하느님과 함께하셨는데 특히 명동성당에서 복사단을 하셨고, 사제품을 받으셨고, 이제 같은 자리에서 금경축 미사를 봉헌하십니다.
명동성당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 정 추기경 :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세례성사를 받은 곳이고 어린 시절 복사단 생활을 거쳤죠. 명동성당은 인생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곳입니다.
평생 멀리 떠돌아다니는 생활만 할 걸로 생각했었는데, 늘그막에 세례를 받고 성장했던 명동에 다시 돌아온 것이 참으로 신기해요. 이것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 이 신부 : 대부분의 사제들은 사제가 되고 사제생활을 하는 데에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기도와 지지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사제로 서품되기까지 또 사제생활을 하시는 동안 신앙적으로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들, 그리고 감회가 많으실 것 같습니다.
- 정 추기경 : ‘어머니’하면 ‘죄송하다’는 마음이 제일 큽니다. 신학교 가겠다는 말씀을 드릴 때 생각이 많이 나네요. 그때가 6·25 전쟁 후 휴전이 되기 전이니까 아직 전쟁중이었죠. 당시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어요. 하루하루 지내는 것을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남은 게 없었으니까요.
어머니하고 단 두 식구가 살던 상황에서 제가 어머니를 보살펴 드려야 하는데 그건 고사하고 어머니를 떼 놓고 신학교 가겠다 말씀을 드려야 하니 그 심정은 죽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정말 ‘발설해서는 안 될 말을 드리는 것이다’라는 것을 절실히 의식하면서 억지로 “신학교 가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반대하시거나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의사를 보이면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포기하겠다는 각오까지 미리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얘기를 들으시고 조금 뜸은 들이셨지만 생각해 보겠다 말씀도 없이 마치 미리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는 듯 즉석에서 “그래? 그러면 가야지” 하셨죠. 아마도 복사단 생활을 할 때부터 제게서 성소를 눈치 채셨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이 신부 : 외아들이셨는데 어머님께서 쉽지 않은 결정을 하셨습니다.
- 정 추기경 : 그렇죠. 당시 신학교에서는 외아들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머니께 “주교님한테 가서 허락을 받아 주시면 가겠습니다” 했죠. 조금의 망설임이라도 보이시면 마음을 접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드리지 말아야 할 요청을 했던 거예요. 그렇게 얘기 드리면 못 하겠다 하실 줄 알았는데, 용감하게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셨던 노기남 대주교님을 찾아 가셨어요. 저의 신학교 입학 허락을 청하자 노 대주교님께서 오히려 펄쩍 뛰시며 “아들 신학교 보내고 나면 혼자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고 말리셨다 하더군요.
노 대주교님은 당시 저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계셨어요. 대주교님이 명동성당에서 수석 보좌신부로 12년 계시는 동안 할아버지께서 본당 회장을 지내셨거든요. 그래서 집안과 자주 왕래가 있으셨고 어머니가 저와 둘이 살고 있는 처지도 훤히 알고 계셨던 거죠. 하여튼 노 대주교님이 반대하시자 어머니는 오히려 고집을 부리시며 떼를 썼다고 해요. “외아들이지만 받아주세요. 먹고 사는 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거예요”라고 말이죠. 그러자 노 대주교님은 마지막에 “난 몰라”하고 답하시더래요. 허락을 안 할 수도, 외아들을 뺏어올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그 책임을 하느님께 미루신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이 부분에서 어머니의 신앙이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어머니로부터 보는 것 같아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쳤던 그 상황을 어머니께서 그대로 재현하셨다고 봐요. 어머니는 노 대주교님께 드렸던 말씀대로 먹고 사는 일, 미래에 근심 걱정을 두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셨던 분이셨습니다.
▲ 사제서품 50주년을 앞둔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과 이성도 가톨릭신문사 사장신부가 4일 서울대교구청 추기경 집무실에서 대담을 나누고 있다.
▲ 이 신부 : 사제서품 성구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또 서품 당시의 마음 다짐은 어떠셨는지요. 기억되시는 후일담들을 들려주십시오.
- 정 추기경 : 서품 성구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로 정했었죠.
사제품을 받을 당시 가톨릭신자 비율은 1%를 넘지 못했습니다. 사제 수도 전국적으로 300여 명 정도였고요. 새 신부 때는 10년만 사제로 살아도 대단하겠다 싶었습니다.
1961년 3월 18일 명동성당 사제서품식에서 성인호칭기도를 드렸던 순간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한국의 가톨릭 신자 비율이 10%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 드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서품 후 60년대 이탈리아 유학시절, 학생들이 내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질문을 하면 거꾸로 “어느 나라일 것 같으냐”고 물었어요. 그러면 일본, 중국 순으로 자신들의 짐작을 말하는데 한국은 10번째는 돼야 나와요.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예 모르는 경우도 많았지요. 교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50년 전 그때 그 시절 에는 선교사들 도움으로 교회가 유지 되었을 만큼 모든 것이 열악했지요.
▲ 이 신부 : 50년의 사제생활은 격동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함께한 시간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청주교구장직 수행 시에는 성직자 양성과 선교 활성화를 통한 복음화율 높이기에 지속적 노력을 보이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서울대교구장 부임 후에는 교회 쇄신과 선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제로서의 직무 가운데 가장 보람됐던 일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정 추기경 : 1970년 청주교구장에 부임할 당시 교구에 한국인 신부님은 6명, 미국 메리놀회 신부님이 20명, 본당이 22개였어요. 저는 ‘청주교구 사제가 100명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매일 드렸죠. 그리고 소중한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성직자 부모님들을 위한 기도도 매일 바쳤지요. 하느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돼 청주교구를 떠나기 며칠 전 사제서품식에서 100번째 신부님이 탄생해서 청주교구 신부님은 106명이 됐습니다.
지금도 매일 저녁 때 바치는 묵주기도 1단은 성직자 수도자 부모님을 위한 기도로 봉헌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2020년까지 가톨릭신자 비율이 20%가 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드립니다.
▲ 이 신부 : 어려움도 많으셨으리라 짐작이 되는데요.
- 정 추기경 : 글쎄요. 살아오면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면서 왜 어려운 일이 없었겠습니까. 매일 순탄한 삶을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기억나는 어려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렵다’는 자의식 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어려울라 치면 이웃한 사제들이 즉시 도와주고 했죠. 또 글쓰기를 통해서 어려움, 근심 걱정을 많이 잊었던 것 같아요. 매일 한 시간이라도 글을 쓰니까, 근심 걱정이 쌓일 틈이 없었다고 할까요. 말이란 후회할 상황도 생기고 또 가치 없고 기억해 주지 않을 무의미한 것들을 남기게 할 수 있는데 글은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니까 생각을 고르게 되죠. 그래서 글쓰기는 쓸데없는 말, 후회 없는 말을 극복하게 하는 훈련이 된 것 같아요.
신학교 시절, 돌아가신 박도식 신부님과 한 방을 썼는데, 그때 사제가 되면 매년 한 권씩 책을 쓰자는 약속을 했어요. 그 얘기대로 사제품 받으면서 두 사람은 서품 기념 책자를 출판했고 이후 계속 책을 썼습니다. 박 신부님이나 저나 둘 다 쉬지 않고 책을 내게 된 것은 아마 그 약속의 힘이 컸지 않았나 싶습니다. 생을 마칠 때까지 글쓰기는 계속 할 것 같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래야 할 것 같네요.
▲ 이 신부 : 예전과 비교할 때 현대 사회에서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사제들의 역할이 요청되는 것 같습니다. 2010년 ‘사제의 해’를 지낸 바 있습니다만, 추기경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람직한 사제상은 어떤 것입니까.
- 정 추기경 : 사제로 산다는 것은 주님을 본받아 주님 십자가를 함께 지는 삶입니다. 제자들이 어린 아이에게서 마귀를 쫓지 못한 후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하소연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약함을 탓하시며 ‘기도 없이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는 식의 말씀을 하셨죠. 주님 제자로 사는 사제들의 생활은 바로 그런 삶이어야 한다고 봐요.
한편 주교는 사제들이 그 직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주라’고 부탁하셨는데 그 당부는 오늘날 주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사제들이 미흡하다 생각이 들면 ‘내가 사제들에게 힘이 돼주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자책감부터 들어요. 잔소리 하고픈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제대로 했으면 사제들이 왜 그렇겠느냐’는 생각에 주님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지난해 사제의 해를 맞아 은경축 맞은 모든 신부님들께 수고의 표시로 조그마한 선물을 했었는데 마음이 참 기뻤습니다. 그간 신부님들께 구체적인 감사 표현을 못하고 살았다 싶어 무언가 표시를 하고 싶었거든요. 이제야 철이 드는가 봅니다.
▲ 이 신부 : 목자로서 양들을 지켜보시는 마음은 늘 한결같으실 텐데, 지난해 한국교회는 교황청이 찬사를 보낼 만큼 아시아 평신도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냈습니다. 그로 인해 아시아 선교 교두보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켰습니다. 평신도들에게 한 말씀 들려주십시오.
- 정 추기경 : 한국 평신도들은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자랑할 수 있는 훌륭한 분들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나날이 발전할 수 있는 이유는 모두 평신도들의 신앙 때문입니다.
매년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성당이 건립되고 있습니까. 이 모습에 전 세계 교회가 놀라고 있습니다. 결국 평신도들이 온 정력을 다 기울였기에 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그뿐 아니라 성직·수도자들을 얼마나 관대하게 주님 앞에 봉헌하고 있습니까. 아들딸을 바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놓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평신도들의 신앙과 열정 덕분에 한국교회가 성장하고 커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성직자들의 복음 선포 노력에도 뒤처지지 않는 것이 평신도들이 지닌 신앙의 정성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 이 신부 : 양적인 신자 성장률과 평신도 활동의 역동성에 대한 평가에 비해 내적 성숙, 질적 복음화에 대한 부분은 아직 노력해야할 여지가 많다는 의견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특별히 평신도들의 역할은 어떤 것이라 보십니까.
- 정 추기경 : 최근 들어 우리 신자들 사이에 성서 공부 열기가 뜨거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1977년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신자들이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없었죠. 공동번역 성서 출간으로 성서 공부의 물꼬가 터진 것이라고 봅니다. 특히 개인별 본당별로 성경을 필사하는 노력들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듯해요.
신앙의 근본은 성경입니다. 성경 읽기, 필사 운동 등 말씀을 바탕으로 한 여러 활동 노력들이 우리의 신앙을 깊어지게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서 공부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하느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은총의 기회가 아닐까 싶네요.
▲ 이 신부 : 올해 사목 교서에서 ‘새로운 복음화’를 강조하셨습니다. 현 교회 상황 안에서 새복음화를 위해, 또 교회 쇄신을 위해 우선적으로 취해야할 조처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정 추기경 :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자기 복음화(自己福音化)’라고 봅니다. 교회는 복음 선포자이지만 먼저 교회 자신이 끊임없는 회개와 쇄신으로 자신을 복음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복음화는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 사항, 사고방식, 영감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변화시키고 바로잡는 것입니다.
각 지역과 본당에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교회의 자기 쇄신과 반성, 복음화의 방향을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각 지역의 특수성과 교구, 본당, 특수사목 등 각 분야와 장소에서 ‘새로운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올바로 파악한다면 ‘새로운 복음화’의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신부 : 4월 1일이면 가톨릭신문이 창간 84주년을 맞습니다. 격려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 정 추기경 : 가톨릭신문이 창간될 당시 우리 교회가 신문을 낸다는 것은 꿈같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맡으신 가톨릭신문 선각자들을 늘 존경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한 사도 직분을 수행하신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문서 선교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시대의 홍보 수단을 십분 활용, 서간문을 남기셨고 그것은 2000년 가톨릭교회 역사를 지탱시켜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서는 대중 매체가 홍보 수단입니다. 그런 만큼 가톨릭신문도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따라 신문을 통한 복음 전파에 더욱 각별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임해야 겠습니다.
84년의 역사를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함께하면서 신자들의 영성을 심화시키는 일에 더욱 힘써주고 앞장서 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