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지나간 곳에는 흔적이 남는다. 흔적이 모여 길이 된다. 그 길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지도제작사다. (주)매핑코리아 최선웅(안드레아·68) 대표는 지난 20년 간 여러 성지 및 교회 지도를 제작해 온 맵(Map) 아트디렉터다. 새남터에서 미리내까지 이어지는 「김대건 신부 유체 이장 경로도」를 비롯해 천진암·배티성지 등 지도를 제작했고, 「하늘에서 땅 끝까지」 등 전국 성지 안내 책자에 실린 지도도 그렸다. 최선웅씨의 반백년 지도 인생 이야기와 그 속에 담긴 교회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봤다.
산 사나이, 땅의 그림을 그리다
1944년 만주에서 태어난 최선웅씨. 그의 지도 사랑은 산 사랑에서 비롯된다. 해방과 함께 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온 최씨는 인왕산 자락 누상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산을 배웠다. 산은 그에게 스승이자 친구였다.
“산과 지도는 뗄 수 없는 관계지요. 산을 오르기 위해선 지도가 필요하니까요.”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던 최씨는 우리나라 최초 사회과부도 「우리나라 지리부도」(1946년 문교부 편수국 발간)를 직접 제도한 외삼촌 이상만 선생의 눈에 들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민중서관(현 민중서림) 미술부에 삽화제작자로 취직했다. 산을 사랑했던 최씨는 민중서관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편집과 인쇄 기술을 발판삼아 1969년 5월 산악전문잡지 「등산」(현 월간 산)을 창간했다. 자본가와 편집장 겸 제작자만 있는 2인 기업이었다.
“혼자서 글 쓰고 사진 찍고 그림 그리는 작업을 다 했지요. 그때 제 나이 스물여섯이었습니다. 월급도 받지 않고, 오로지 우리나라 산악 전문잡지를 만들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산악 전문잡지 제작에 매달리던 최씨는 1971년 교진사에 들어가 국내 최초 등산가이드북인 「등산코스안내집」을 만들었고, 월간 「산악인」(2호 내고 폐간)을 창간하기도 했다.
산 사나이 최선웅씨가 본격적으로 ‘지도’에 입문하게 된 것은 1974년 일본 지도를 제작하던 동양출판사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그는 이곳에서 ‘천직’인 ‘지도제작’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천생연분’인 신자 부인을 만나 가톨릭에 입문했다.
현대 교회의 김정호, 성지를 그리다
단순히 ‘지도쟁이’였던 그가 성지 등 교회 관련 지도를 제작하게 된 것은 1992년 새남터에서 미리내성지로 이어지는 김대건 신부 유체 이장 경로를 개발하면서부터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부인의 손에 이끌려 성당에서 관면혼인을 하긴 했지만, 바쁜 회사 일을 핑계로 세례를 미뤄왔던 최씨는 결혼 10주년을 기해 서울 신월동본당에서 예비신자교리를 받았다.
“회사가 어려워져 부도 위기를 맞고 나서야, 하느님 생각이 번뜩 났습니다. 이제야 내가 죄를 받는다 생각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았지요.”
▲ 최선웅씨가 제작한 지도가 실린 서적들.
“김대건 신부 유체 이장 경로를 찾기 위해 일본 고지도를 구해 옛 지명을 일일이 찾았지요. 1년 동안 거의 매주 산길을 찾아다니며 옛 지명과 현 지명을 대조해 지금의 순례길을 찾아냈어요.”
최근에는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위원장 유흥식 주교) 성지순례사목 소위원회에서 발간 예정인 전국 성지안내 포켓북에 실릴 전국 도보성지 순례지도 제작도 준비하고 있다.
「기쁜소식」 전갑수(베르나르도) 대표는 “최선웅 선생님은 교회 관련 지도 제작의 달인”이라면서 “이분만큼 교회 관련 지도 제작에 정통한 분은 찾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국 곳곳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순례길을 지도 위에 그릴 겁니다. 그래서 전국 130여 개 성지의 순례길을 모두 이으면 천리길이 되도록 꾸며볼 거예요.”
천도를 그리다
평생 ‘지도’만 생각하며 살아온 그는 교회 관련 지도 제작을 돕는 일을 당연한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신자로서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저에게 하느님은 너무 높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예요. 무한한 가능성이고, 우주 그 자체죠. 마치 티베트에 있는 정복당하지 않은 신성한 산 ‘카일라스’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은 제 인생의 나침반 같은 존재입니다. 절대 타협하지 않는 산과도 같은 존재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느님을 위해 하는 것이 신자의 당연한 의무 아닌가요?”
만 67세, 지도만 생각하고 지도만 그려온 그의 마지막 꿈은 ‘천도 제작’이었다.
“땅의 그림이 ‘지도(地圖)’이지요. 이 다음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서는 하늘의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요. ‘천도(天圖) 제작’이라고 하면 말이 될까요?”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최선웅씨의 얼굴 위로 소년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