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일 복음은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열한 제자」라는 말은 사실 아픔을 지닌 말이다. 본래 「열두제자」라고 불려야 하는데, 기라옷 사람 유다가 스승을 배반하고 떨어져 나가 이제는 「열한 제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거치면서 예수님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이루었던 「열두 제자 공동체」는 깨어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자들 편에서 보면, 이렇게 깨어진 제자공동체 앞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셧다는 것만 해도 지극히 은혜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만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막중한 사명까지 주시고 승천하셨다고 전한다.
복음서들은 모두 제자들의 이 파견이 있기 전에 예수께서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얼마나 정성들여 가르치셨는지에 관해 전해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복음서의 앞부분들은 복음서의 제일 끝자리에 잇는, 세상 만민을 향한 제자들의 이 파견을 준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이 누구신지 배워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이신지를 깨닫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꼭 필요했던 것은 그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분이 누구신지 참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파견될 준비를 갖춘 것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승천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으로의 파견을 의미하엿다. 사실, 복음서의 다른 대목들을 통해 잘 알고 있듯이, 제자들은 예수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시자,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유혹」을 크게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약한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가오시어 힘을 주시어 일으켜 세우셨다. 예수님의 승천도 제자들에게는 또 다시 세상을 두려워하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믿고 있던 스승 예수님이 떠나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파견을 받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 용기있게 복음을 선포하였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도 신비로운 방식으로 『주님으로 그들과 함께 사신다」는 것에 대한 그들의 굳은 믿음이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의 오른편에 좌정하신』(마르 16,19) 예수님은 이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신다. 떠나셨다는 점에 있어서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에게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떠나가심』은 새로운 차원에서 그들과 『더 가까이, 함께 계시기 위한』것이었다.
그분은 이제 특정 공간과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딛든지 현존하실 수 있는「주님」(「퀴리오스」)이시다. 그러기에 「주님이신 예수님」(마르 16,19)은 이제 그들과 새로운 차원에서 오히려 그 전 보다 『더 가깝게』계실 수 있는 분이 되시었다. 그분은 제자들이 어느 곳에 가 있건, 어느 처지에 있건, 그들과 함께 계실 수 있는「주님」이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의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파견되는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러 저러한 구체적 능력이 아니라, 바로 주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분께서 자신들과 늘 함께 해 주실 것이리라는 믿음도 포괄하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의 끝 구절에 나오는 다음의 말씀은 이를 증거한다 :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마르 16,20).
구약서서를 보면 만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광경을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세우실 구원의 날로 묘사하는 곳들이 있다(예컨대, 이사 2,15 미가 4,1~5), 그리고 그에 관한 소식을 「복음」(기쁜 소식)으로 삼고 있다. 이와 비교해, 오늘 복음에는 정반대의 움직임, 곧 만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모여 오는 움직임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부터 제자들이 만백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움직임이 보인다. 오늘 복음 말씀에 의하면 이제 만백성의 구심점은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느님 오른 편에 앉으신』(마르 16,19) 그리스도이시다. 이 분이야말로 「기쁜 소식」의 진원지이며, 하느님 백성의 중심이시다.
오늘 복음에서 보았듯이 열 한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어 만민에게 다가가, 스승 예수께서 계시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전파할 사명을 받았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곧 예수님의 뜻이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듯은 곧 제자들의 뜻이 되어, 세상 만민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교회도 같은 사명을 갖고 있다. 그런데 남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소식이 기쁘다는 것을 체험하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서 보앗듯이 먼저 「함께 계시는 주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런 믿음과 사랑이 실천될 수 있는 공간인 신앙공동체가 꼭 필요하다. 신앙의 기쁨은 자기이익만 추구하고 살아가는 고립된 삶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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