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르멜 영성학파를 든든히 지탱시켜 주는 두 개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같은 시대의 유사한 상황에서 생활했던 그들은 생애, 활동 및 가르침에 있어서 매우 밀접한 관계 중에 있으며 상호 협력자였다. 십자가의 요한은 그의 공적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의 저서도 그리 많이 읽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완덕의 길에 진보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글을 썼으며, 초탈과 정화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고차원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쓰는 언어들 또한 매우 미묘하고 형이상학적이어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의 가르침과 저서들 그리고 영성을 고찰하기에 앞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생애
요한 데 예빼스(Juan de Yepes : 십자가의 요한의 속명)는 1542년 스페인의 아빌라 근처의 조그만 마을 폰티베로스에서 아버지 곤잘로 예뻬스와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의 3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 요한이 일곱 살 되던 직조업을 하던 아버지가 병고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로 인해 경제 형편이 어려워진 가정에서 어린 요한은 극도로 가난한 삶을 경험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가문출신이엇지만 가난한 어머니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집안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고, 안정되고 평안한 삶을 포기하여 충실과 희생의 영웅적인 사랑을 선택하였다. 어린 요한은 어머니와의 결혼을 위해 물질적 부유와 가문의 사회적 명성 등을 버렷던 아버지의 사랑의 결단에 대한 이야기를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들으면서 성장했다. 이로써 요한은 사랑의 우선적인 가치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는데 그것이 훗날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사랑의 영성의 바탕을 이루게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요한이 아홉 살 되던 1551년에 온 가족은 고향을 떠나 무역도시인 메디나 델 캄포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극빈자들을 위한 기술학교에 들어가 목공, 재봉, 미장 등 기술과 함께 기초교육을 받았다. 또한 그는 성당의 여러 봉사 업무와 미사 중 복사할 책임을 맡아 수행하면서 좋은 신심을 키웠다. 그 후 요한은 이 도시의 한 자선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되는데 환자들을 돌보는 일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한 구호금을 모으기 위해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인격적, 신앙적 형성을 위해 중요한 청소년 시기에 요한은 육체적·심리적·영적으로 고통받고 있던 많은 환자들과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지내면서 소중하고 유익한 체험들을 하였다. 그들과의 관계 안에서 그는 고통을 겪으시는 하느님,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분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충실하게 일하며 진지하게 생활하던 요한에게 병원장 알바레즈가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 그는 1559년 예수회 수도원에서 경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4년간 문법, 수사학, 철학, 형이상학 등을 열심히 고부하며 미래교회의 학자로서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요한의 직업은 자신과 가족들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요한을 눈여겨 보며 신임하던 병원장은 그가 사제가 되어 병원의 원목으로 활동해 주길 희망했다. 그러나 그에게 강하게 작용한 수도 성소는 그러한 인간적 안정 대신 가르멜 수도 생활을 선택하게 하였다. 그는 21세 되던 1563년 「성녀 안나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그는 공동체의 규율을 철저히 준수하며 1년 수련 기간을 지낸 후 1564년 5월 21일에 마티아스의 요한이란 이름으로 수도서원을 하였다.
서원 후 스페인 학문의 중심지인 살라망카로 가게 된 요한은 그곳에서 철학, 신학 등 학문에 전념하였고, 당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했던 석학들까지 참여하던 신학적 학문의 토론장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하느님을 향한 생활에 열중하였다. 1567년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성녀 안나 수도원」에 갔을 때 마침 개혁 수녀원을 창립하러 그곳 메디나에 온 아빌라의 예수의 데레사와 만나게 된다. 요한은 데레사가 초창기의 원 회규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생활로 여자 가르멜 수도회 뿐 아니라 남자 수도회도 개혁하고자 하는 구상을 듣게 되었다. 좀 더 엄격한 수도 규칙을 준수하던 카르투시오회로 옮길 마음을 품고 있던 요한은 데레사의 의도에 공감하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고 그 해 11월에 신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살라망카로 되돌아갔다. 1568년 여름, 예수의 데레사가 발랴도리드에 또 하나의 개혁 수녀원을 세우려 하자 그 여정에 요한 수사도 동참하여 데레사가 작성한 규칙을 따르는 새 생활 양식을 논의하며 몇 주간의 단기 수련을 받았다.
1568년 11월 28일 마침내 초기규칙을 지키기로 선언하는 남자 개혁 수도원이 아빌라의 두루엘로에서 창립되었다. 요한은 다른 두 동료와 함께 매우 가난하고 검소한 생활 안에서 더욱 깊은 잠심과 단순성을 지니고 살았다. 그들은 다시 서원을 했으며 그 때 요한은 그의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이라 결정하였다. 그들의 주변의 마을에 제한적이나마 사목적 봉사도 하였다. 처음부터 십자가의 요한은 입회자, 수련자들의 양성 업무, 수녀들의 고해성사 및 영적지도 업무에 헌신적이었다.
1571년 10월 예수의 데레사가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자 그녀는 수녀원 규율을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하였고, 십자가의 요한을 수녀원 고해신부로 초빙하였다. 그는 성녀가 원장으로 있던 2년 동안 온화함과 깊은 체험적 지식으로 완덕을 향한 자기부정이 가르침을 펼치며 수녀원의 쇄신과 양성을 도왔다. 성녀가 임기를 마치고 떠난 후에도 그는 몇 년간 더 그 수녀원 곁의 오두막집에 기거하면서 매일 수녀들을 위해 성사 집전 및 영적 지도 업무를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십자가의 요한을 개혁운동의 선구자로 예의 주시하던 완화파에서는 1577년 12월 2일 수도회의 질서 문란과 장상에 대한 불순종을 주도하며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이유로 요한을 납치, 톨레도의 수도원 골방에 감금하였다. 이 감옥과 같은 곳에서 극도의 모욕과 멸시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거기다가 하느님의 부재감을 체험하면서 그의 영혼은 극적으로 고통스런 번뇌로 신음해야 했다. 한편 그는 하느님께 대해 전혀 다른 형태의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어두운 정화의 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의 영혼은 어둔 밤을 거치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의 감금 생활은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었고 오히려 결정적으로 유익한 체험을 하도록 한 계기였다. 그는 거기에서 강렬한 신비 체험을 하였고 영적으로 강화된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며 영적 및 문학적 작업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은 1578년 여름 밤 감금된지 9개월만에 톨레도 수도원 탈출을 성공한다. 이 후 안달루치아의 「갈바리오」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가르멜의 산길」과 「영혼의 노래」를 집필하게 된다. 1579년엔 그가 바에자의 신학원장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2년간을 지냈는데 그는 맨발의 가르멜 회원들이 생활의 중심인 묵상기도를 성실히 해야 할 것과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588년 십자가의 요한은 총회에서 수석자문 및 세고비아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어 고향 카스틸리야 지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590년, 1591년 6월 등의 총회에서 그는 수도회 자문회에 수녀회가 예속되는 것과 총장이 수도 공동체에 대하여 지나친 법률적 조치를 취하는 점에 반대하였던 이유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어 평수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1591년 9월초 그는 열병으로 눕게 되었고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의 모욕과 멸시 속에서 고통을 당하였다. 일생 동안 자기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르던 십자가의 요한은 같은 해 12월 14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1675년 1월 15일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12월 27일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26년 8월 24일 교황 비오 11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교회박사」로 추앙하며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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