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평신도’편은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각 수도회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도록 도움을 준 평신도들을 발굴하고, 행적의 의미와 그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살펴본다. 평신도의 보이지 않는 노력 위에 한국교회 선교의 역사가 견고히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 한국의 평신도
“우리의 선인들은 기막힌 천재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만들 수 있었다. 이 평범한 속담을 통해 사람에게는 역사적 생명이 소중하고, 이 생명을 키우기 위해 살아있을 때 노력해야 함을 우리의 선인들은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이름을 남기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지 않은 이라 하더라도 아름다운 마음이나 의연한 행동 때문에 역사적 생명을 부여받고 있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굳은 신앙심과 죽음을 무릅쓴 신앙의 실천으로 인해 믿는 이들의 마음에서 계속하여 기억되고 존경받는 이들도 있다.”
고려대학교 조광 교수(한국사학과)는 1994년 한국가톨릭문화신앙회에서 펴낸 「항아리」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을 가리켜 이렇게 묘사했다. 굳은 신앙심과 죽음을 무릅쓴 신앙의 실천, 대부분 평신도로 구성된 신앙 선조들의 노력은 한국 땅에 ‘선교의 시대’를 열게 했다.
평신도들은 성직자가 없는 조선땅의 한계를 깨닫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였으며 이 가운데 정하상은 한국교회에 성직자를 영입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평신도들은 성직자가 영입된 후에도 목숨을 걸고 신앙을 증거했으며,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는데 큰 힘을 보탰다.
또한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의 선교사들을 도와 계속해서 한국교회의 성장에 이바지했으며,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모상을 그대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 성직자 영입으로 본 평신도의 열정
우리나라 평신도의 대표격인 정하상은 1816년 겨울 만 21세의 나이로 처음 북경으로 떠났다. 그가 북경으로 떠난 것은 북경 천주당을 찾아 조선의 소식을 전하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기 위함이었다.
성직자 영입운동은 정하상만이 전개한 노력은 아니다. 조선 내 많은 신자들이 정하상과 함께했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힘을 보탰다. 당시 정하상을 도와주던 신자들 중에는 동정부부로 유명한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도 있었다.
그들은 정하상을 자신의 집에 거처하도록 했고, 북경에 가는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도맡아했다. 그들은 1819년 순교했는데, 정하상이 북경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중 포졸들에게 잡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 정하상은 1816년 이후 조선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을 위하여 무려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였다.(탁희성 작)
▲ 역관 출신인 유진길은 그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교회와 연락하며 정하상을 도왔고, 함께 교황에게 올리는 서한을 작성하기도 했다.
▲ 하급 마부 출신인 조신철 또한 정하상을 도와 북경을 왕래하며,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평신도 정하상과 그의 동료들은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북경을 왕래했으며, 1830년 10월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선교사가 입국할 수 있는 경로를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만주 땅 마가자에서 병사하자, 뒤를 이어 같은 수도회 소속 모방 신부가 1836년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이광렬 등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 한국 평신도들의 신앙 실천
우리나라 역사 속 평신도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8년 12월 발표한 사도적 권고인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잘 따르고 있다.
교회의 사명에 능동적이고 의식적이며 책임 있게 참여하고 있으며,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든지 ‘네’하고 응답했다.
교회 안에서 구원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기본 전제인 성덕을 갈고 닦아 실천했으며,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과제인 ‘친교’ 또한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지켜왔다. 친교 안에서 은사와 직무, 봉사를 행했으며, 교육의 의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국 평신도의 대표격인 정하상 성인을 보자. 윤민구 신부(수원교구)는 ‘정하상 성인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글에서 정하상이 ▲성직자 영입운동뿐 아니라 ▲신학생 선발 ▲성직자 보좌활동 ▲신자들의 지도자 역할을 도왔다고 강조한다.
서울에 집을 마련해 서양 선교사들을 집에 기거하게 했고, 비서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또 선교사들의 지방 출장에도 동행했고, 신자들의 성사를 돕기도 했다고 전한다.
정하상은 특히 ‘신자들의 지도자’로서 교리에 밝고, 다른 교우들의 회개를 도왔으며, 덕성과 굳은 믿음, 충직한 사람으로서 당시 ‘평신도의 모범’이 됐다. 시성 조서에서 이 베드로의 증언은 정하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와 모든 신자들이 증언할 수 있는 바지만, 그(정하상)는 참으로 덕성스럽고 굳세었으며 충직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리에 무척 밝고 놀라울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이러한 재능과 덕 때문에 신자들은 그를 진정으로 장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김제준 성인은 자신이 회개한 동기가 정하상의 권고 덕이었다고 고백한다.
“저의 백부께서 일찍이 천주학을 배웠으므로 저도 역시 이를 믿다가 신유박해 시에 나라의 금령이 지엄하여 다시 학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정하상이 제게 권하여 다시 배우게 되었으므로 저는 1년에 여러 차례 정하상의 집을 오고가며 수계하였습니다.”
정하상 성인과 같이 진정한 평신도의 모습을 본 적도,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는 이들이 ‘평신도의 의미’를 깨닫고, 이미 스스로의 소명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교’와도 맞닿는 한국의 평신도 정신은 계속해서 우리 신앙의 유산을 타고 면면히 흐르고 있다. ‘앞서간 평신도 신앙선조를 우리 신앙의 모범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문제는 오롯이 우리 자신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