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가 새 가톨릭대학 건립을 계획했던 80년대 초, 교회 내 여론은 ‘수원교구에 대신학교가 건립되면 기적일 것’이라고 강하게 회의했다.”(가톨릭신문 1988년 5월 1일자)
‘기적일 것’이라고 말했던 수원가톨릭대학교(이하 수원가대)는 현재 수원 내 학문의 상아탑으로서 성소를 가진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며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오늘날 교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수원가대의 역사는 1983년 12월,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으며 시작한다.
다음해인 1984년 3월 2일, 수원가대는 외부인사를 초청하지 않고 제1회 입학식을 간소하게 진행했다. 당시 신문은 4월 초순 쯤 개교기념식 및 본관 건물 축복식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이후 기사는 수원가대 합격자 명단 등 작은 소식들을 전하다가, 1988년 5월 1일자 신문에 6일 열릴 수원가대의 축복식 기사를 크게 실었다.
“교회 내 여론이 불가능하다고 본 이유는 문교부 인가를 획득하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 대학의 건립비용이 엄청나 수원교구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재정문제 및 교수 확보의 난점 등이었다. 그러나 교구는 사제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및 세계교회의 실정과 무엇보다 북한?중공 등 공산권국가 선교를 준비해야 할 한국교회가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성소자 발굴의 옥토라는 사실 및 서울관구의 대신학교 재학생이 너무 많아 적절한 교육이 어렵다는 판단 아래 제4 대신학교 건립을 강력히 추진했다.”
기사는 당시 수원가대 건립을 둘러싼 여러 어려움들을 전하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대학 건립비 80억 원을 마련하기 위해 교구가 몸살을 앓아야 했던 일, 건립비 마련을 위한 김남수 주교의 노력, 초대 건설본부장을 맡았던 정해성 신부의 선종 등 많은 어려움들이다.
“수원가대의 분위기는 교수신부와 신학생 간의 관계가 가족적이라고 할 만큼 친밀하다. 학생들은 교수신부를 ‘형 같다’ ‘아버지 같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하는가 하면 교수신부도 재학생의 이름은 물론 성격, 가정환경들을 거의 파악하고 있으면서 이들을 도우려고 애쓰고 있다.”
많은 이들의 눈물과 노력을 통해 건립된 수원가대. 기사는 수원가대가 건립된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왕림지역을 가리키며, 박해시대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켜온 교우촌이 있던 성소의 요람지이자 개화기 교육의 산실이라고 칭한다. 그렇게, 그곳에 ‘수원가톨릭대학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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