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축하미사 봉헌한 김태호옹 - 60년을 한결같이 매일 미사 참례
올해로 1백세를 맞는 김태호(바오로·원주교구 의림동본당)옹은 앞으로 당분간은 깨지기 어려운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 6·25전쟁등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40대 이후 60여년간 평일 미사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봉헌하고 있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충북 제천 지역에 신앙의 정초를 놓은 장본인인 그를 위해 본당에서는 지난 12월 8일 백수(白壽) 축하미사를 봉헌했다.
한번도 지팡이에 의존해 걸음을 뗀적이 없는 그의 왕성한 젊음은 바로 그가 평일미사 에 대한 열심함을 오늘까지 지켜 올 수 있도록한 은총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김태호옹의 가족은 증손까지 합쳐 모두 78명. 이제는 손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 지 못할 정도로 대가족을 거느리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그가 걸어온 1세기 신앙사는 결코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김태호옹은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는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어서인지 자세한 연대까지 기억하는등 1백세의 노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건강을 자랑했다.
『저는 가끔 자신을 한국판 노아에 비교하곤 합니다. 만주에서 아내와 자녀 6명을 데리고 제천으로와 어느덧 80여명이 가까운 대가족을 이룬것을 생각하면 하느님 은총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1898년 평양시 중화군에서 출생한 김태호옹이 충복 제천에 자리잡게 된 것은 일제하 이던 1937년. 만주에서의 교직 생활중 역시 교직생활을 하던 부인 김광하여사 (엘리사벳·93)와 결혼한후 제천으로 온 그는 당시 제천 지역에 상주하고 있던 5~6가구에 불과한 신자 가정들과 함께 가톨릭 신앙을 일궈나간다.
▲25년간 본당회장
1940년부터 25년간 원주교구 남천동 본당 초대 회장직을 역임했다. 이기간중 가장 어려웠던 때는 역시 6·25전쟁. 당시 그는 남하한 공산군의 인민 재판을 피해 산속으 로 숨어다녀야만했다.『당시 젊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공산당에 가입했어요. 이들 은 당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본당 사제와 사도회장 목록을 작성해 체포하러 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그는 타지역을 이주하지 않았다. 어렵게 꽃피우기 시작한 제천 지역의 신앙을 지키기위해서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6·25전쟁을 가톨릭 교세가 급격히 늘어난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국군 점령하에서 유엔 원조물자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맡았던 그는『당시 밀가루나 구호물품을 타기 위한 신자가 셀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늘어났다』고 회고한다.
그는 철저한 검소주의자다. 자녀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는 신문지 한장버리지 못하고 화장실 화장지도 길게 끊어 쓰지 못한다. 심지어 사과 껍질도 얇게 깍게 할 정도로 그는 검소한 생활이 모에 배어 있다.
그의 장수는 사람이 단순히 오래산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열심함 그리고 순수함. 그는 1백년 삶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 은총의 신비를 진정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보답할 만한 그 무엇인가를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생활에 배어나는 변함없는 신앙은 하느님 은총에 대한 당연한 응답이었으며 바로 지금까지 그 자신을 지탱해준 유일한 삶의 힘이었다.
그의 말대로 60년전 여섯가구에 불과했던 신자수가 지금은 엄청나게 불어난 제천 지역 복음화가 그 하느님의 사랑을 바로 말해주고 있었다.
◆87세 현역 등산 가이드 이인호옹 - “아! 호랑이 때려잡던 백두산이 그립다”
산에서 맞는 새해의 느낌은 어떨까. 산을 찾아 자연으로부터 얻는 기쁨과 즐거움은 그 무엇에 견줄 수 있을까. 산에서 느끼는 청량함은 신선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공해에 찌든 도심을 벗어나「순수」와「정갈」이 살아 숨쉬는 그 곳. 산을 오를 때의 힘든 노력은 육체적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만 정서적 만족에도 큰 보탬이 된다.
이인호(요셉·87세)옹. 그는 외견상 자그마한 체구에 흰 머리를 가진 평범한 노인처럼 보이나 35년 가까이 다른 사람에게 산을 소개하는 젊은이 못지 않은 패기와 명랑함을 지닌 등반 안내자다.
내일 모레면 구십. 이 나이에 혼자서의 등산도 아닌 다른 이의 산 안내까지 한다는 사실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등산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35년은 긴 세월. 이옹은 그의 반평생을 오로지 이 일에 투신했다.
풍부한 경험,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이옹의 안내 솜씨는 국내에선 으뜸. 늙은이라고 앝보다간 큰코 다친다. 자칭 타칭 등산 베테랑이라는 사람들도 이옹의 등산 솜씨,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위치까지 기억해가며 상세한 설명을 해주는 그의 솜씨에 혀를 내두른다.
전국의 크고 작은 산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꿰고 있는 산악인 이옹은 북으론 백두산, 남으론 한라산 등 한반도에 있는 산이라곤 안 가본 곳이 없다. 에베레스트, 맥킨리봉 등 외국의 유명 산에서의 등산 경험도 많다.
못하는 것이 없어 젊었을 땐「한량」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는 이옹은 한땐 포수로서 만주 벌판과 시베리아서 이름을 떨쳤다고. 백두산에서 생활할 땐 호랑이도 4마리나 잡았다 자랑하기도 했다.
이옹은 대구 시내 중심가인 매일빌딩 앞에서 금오등산사(대구시 중구 계산동)를 차려 그의 경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고 있다.
이옹은 지난해 11월 24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이옹은『이제부터는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 나는 그 중에서 약간 뛰어난 피조물 중의 하나』라고 조금은 겸손되게 생각을 바꿨다 한다.
늦게나마 하느님을 알게 돼 무척 행복하다는 이옹은 세례 받도록 이끌어준 가톨릭신문사 박태봉 국장께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이옹은 근 7개월 교리반에 다니며 지각 한 번 하지 않았다. 교리를 가르친 김 데레사 수녀는 교리 지식보다 그 열성에 세례를 주게 됐다고 전한다. 그 덕분에 이옹은 세례식에서 개근상을 받았다.
일제의 박해를 피해 일찍 고향인 경북 풍기를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 보니 가족들과 헤어지게 됐다는 이옹은 슬하에 둔 아들 3형제의 소식을 모른다 했다. 아들 3형제가 자기를 닮아 모두 잘 생겼다고 자랑하는 이옹은 요즘 들어 자식들 생각에 잠을 설칠 때가 많단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죽기 전에 자식들을 한 번 보고 싶다』고 말하는 이옹의 주름 깊은 눈가엔 지나간 세월의 회상 때문인지, 자식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큰 아들 태봉(1951년생)씨는 행방불명, 둘째 아들 영봉(1953년생)씨는 85년에 파라과이로 이민 갔고, 막내아들 덕봉(1956년생)씨는 미국 시카고에 있다는 소식이 그가 알고 있는 전부. 자식들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연락 주기를 당부했다.
부정과 불의, 패륜 행위가 판 치는 요즘, 맑은 정신과 바른 품성을 키우려면 등산을 하라고 젊은이들에게 재삼 강조하는 이옹의 모습에서 구십춘광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다음 주엔 지리산 가기로 예약되어 있다고 말하며 힘차게 일어서는 이옹의 모습에서 세월의 무게도, 삶의 어두운 편린들도 결코 그를 억누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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