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방자치시대다. 가톨릭교회는 예로부터 지방자치를 구현해 왔다. 지역별 교회의 특성을 살리면서 협조와 보완을 통해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전통이자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본보는 제3천년기를 맞기 위한 교회의 총력 결집이 요구되는 가운데 개성과 열성으로 지방시대를 열어가는 교회의 모습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각 지방의 특성과 조건을 최대한 살리면서 미래 교회를 향해 단단한 포석을 놓아가고 있는 각 교구의 선택은 무엇일까. 2천년대를 맞기 위한 준비가 열기를 더해가는 새해 아침 본보는 각 교구를 순방, 앞서 열어가는 지방시대 지역 교회의 희망찬 포부를 들어본다. 교구 탐방은 교구 설정 역순으로 진행된다.
제주교구는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친한 국내 최대의 섬 제주도를 하나의 복음화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국내 유일의 섬 교구다. 오는 99년「선교 1백 주년」을 앞두고 제주교구는 그 어느 때보다「정중동」의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그만큼 전 교구민의 결집이 요구되고 부담이 가중되는 시기를 맞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선교 1백 주년 기념 사업들을 차곡차곡 진행시켜 가는 교구의 모습은 이제「열악한 교세」「초미니 교구」의 이미지는 털어버린 지 오래다.
◆제주교구의 오늘
제주교구의 신자 수는 95년 말 현재 3만 9천여 명. 사제 수는 교구장 김창렬 주교를 포함해 한국인 사제가 24명, 외국 선교 사제가 4명 등 모두 28명이다. 16개 본당에 공소는 모두 15개. 71년 지목구로 독립, 설정될 당시 8개 본당에 불과한던 것에 비기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제주교구는 오는 99년 선교 1백 주년을 맞이한다. 제주교구가 추진 중에 있는 선교 1백 주년 관련 사업들을 보면 교구가 쏟고 있는 의지와 노력들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제주교구는 지난 93년 8월 일찌감치 선교 1백 주년을 준비하기 위해 교구 평협과는 별도로「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추진위 구성과 함께 분위기 조성에 93년 한 해를 보낸 제주교구는 94년 들어 1백 주년 사업들이 본격화되면서 하나둘씩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제주교구는 그 1단계 사업으로 정난주 마리아 묘소를 성역화하고 94년 9월 이곳에서 대대적인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했다.
95년도에는 황사평 순교자 묘역을 새로 단장하고 교구 성직자 묘지를 조성했으며, 제 주교구 초대 교구장인 현 헤롤드 대주교의 유해를 성직자 묘지에 이장하면서 2단계 사업을 마무리지었다.
지난 해에는 1백 주년 기념 순례 성당 부지 물색작업과 1백 년사 편찬을 위한 지속적인 사료 수합 및 분류작업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올해엔「신축교난」을 재조명하기 위한 심포지엄을 계획 중이고, 연차적으로 제주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인 관덕정 성역화사업과 골롬반회 선교사 공덕비 건립, 교구사 편찬 등 기념 사업들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제주교구의 1백 주년 사업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제주지역에 신앙이 공식 전래되기 30년 전인 1860년대 이미 전교활동을 펼쳤던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의 시성운동과 신자 배가운동이 그것이다.
김기량은 1866년 병인박해 직전 잡혀 가슴에 대못이 박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주교구는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최양업 신부 서한 등 사료들을 토대로 그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 시성운동을 적극 추진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또 선교 1백 주년 기념 사업 추진을 공식화 한 93년 말 3만5천여 명이던 교세를 99년까지 7만 명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다. 제주도 인구 대비 12%에 육박하는 수치다.
이 두 가지 사업은 1백 주년을 내실을 다지고 신심 깊은 교구로 쇄신을 이루는 분수령으로 삼고자 한다는 점에서 제주교구 선교 1백 주년 사업의 중심이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제주도에 천주교 신앙이 전래된 경위는 도민들의 자발적인 입교와 포교의 결실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국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경로와 매우 흡사하다.
◆1백 년의 신앙 역사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래된 것은 뮈텔 주교가 1899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뻬이네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 신부를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견한 데서 비롯된다. 선교 사제의 부임으로 신앙에 활기를 띠게 된 제주 지역은 1900년대 초 영세한 신자 수가 2백42명, 예비자는 7백여 명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부터 각 촌, 리 등지에 공소가 세워지는 등 교회 공동체로서의 꼴을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1909년 10월 구마슬 신부가 제주읍에 최초로 신식학교인 제주 사립신성여학교를 설립해 여성교육의 문을 열었고, 엄다께 신부는 서흥리(지금의 복자수도원 자리)에서 귤나무 재배를 시작해 제주도에 감귤 재배의 효시가 되는 등 구마슬·엄다께 신부의 16년에 걸친 선교활동은 향후 제주지역 교회 발전에 토대를 닦은 시기였다.
1911년 포교 관할이 대구교구로 이관됐다가 1933년 광주교구로 관할이 옮겨지면서 포교담당도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성 골롬반외방전교회로 이관됐다.
이후 제주도에 신앙이 전래된 지 73년 만인 1971년 광주대교구에서 분리돼 제주지목 구로 독립, 설정됐으며 6년이 지난 77년 4월 정식 교구로 출범하면서 한국인 교구장 박정일 주교를 맞이하게 된다.
그 후 박 주교의 전주교구장 이임으로 1년반 동안 교구장 공석 기간을 거쳐 1984년 1월 지금의 김창렬 주교가 제3대 교구장에 부임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1백 년의 신앙 역사를 지닌 제주교구는 일반의 이해와는 달리 두 차례 한 맺힌 과거를 갖고 있다. 교회 내적으로는 본격적인 포교활동이 전개되던 1901년 3월 발생한 이른바「신축교난이 그것이고, 사회적으로는 6·25 동란을 앞두고 일어난「4·3사태」(1949)가 그것이다.
천주교세의 확장에 불만을 가진 무당들의 모함과 일본인 상인들과 손 잡고 민란을 책동하던 당시 대정군수 채구석 등의 선동으로 발생한 신축년 교란 와중에 천주교 신자 7백여 명이 관덕정 마당에서 참살되는 비극을 맞았다.
또 일제의 만행으로 거의 소멸 위기에까지 내몰렸던 제주교회가 해방을 계기로 다시 움틀 무렵 일어난 4·3사태는 그에 앞선 3·1 사태(1948)와 더불어 도내 선교활동에 다시 한 번 막대한 지장을 안겨다 주었다.
특히 제주도민 모두를「빨갱이」로 몰아부친 4·3사태는 제주도민들의 추산으로 약 8만여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갔는가 하면 이후「육지」를 터부시하는 아픈 결과를 초래했다. 『육지 것들』이란 말이 아직도 제주도민들 사이에 가장 비속한 말로 손 꼽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제주교구는 이러한 제주도민의 애환과 이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지역 복음화 사업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사회 속의 교회
육지와 단절된 변방의 낙도, 소출을 기대할 수 없는 메마른 땅, 삶의 의욕을 송두리채 앗아가는 자연 재해들. 극도로 열악한 이러한 환경들은『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하게 만들었고 미신과 사이비 종교단체의 난립을 몰고 왔다. 그들에게『하느님의 말씀』운운하는 것은 하나의 사치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한 제주도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으로 다가온 것이 바로「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였다. 1962년 당시 한림본당 주임이던 임 빠뜨리치오 신부에 의해 가축은행으로 출발했던「이시돌협회」는 신성학원과 더불어 제주지역 교회가 대 사회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림수직, 이시돌의원, 이시돌목장과 돈육가공공장 등 이시돌협회가 주관하고 있는 각종 사업들은 제주도민들의 생활 향상과 복지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여를 해왔다. 철저하게 모든 이익을 도민들에게 되돌려 주고, 나아가 제 궤도에 오르면 미련없이 사회에 귀속시켜 온 이시돌협회의 행동은 바로 가톨릭 정신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못할 것이었다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1차산업의 사양화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시돌협회는 피정센터를 건립, 신심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는 등 사회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면서 또다른 역할을 찾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7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관광 붐과 감귤 농사의 수입으로 도민들의 생활은 나아졌지만 외지문화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초래된 세속화는 제주도와 제주지역 교회가 맞딱들인 새로운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아울러 제주도 개발 정책에 따른 환경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
신성학원을 통해 인성교육에 주력해온 제주교구는 지난 94년 10월 이시돌 청소년사회교육원(젊음의 집)을 건립, 본격적인 청소년 인성교육에 뛰어들었다. 이곳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거치는 학생은 한 해 수천 명에 달한다.
제주교구는 뿐만 아니라 천혜의 관광 자원인 제주의 자연을 보존하고 가꾸는 데 도민과 함께 앞장서고 있다. 도민 주체 개발과 환경 보존을 주창하며 91년 결성된「도민자치실현 제주범도민회」에 다수의 신부와 평신도들이 동참해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사안에 따라 적절한 교회의 입장 표명으로 제주도 개발 보존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움직임에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제의 부족 현상이다. 현재의 사제 수는 관광사목이나 해양사목 등 특수사목에 전담 신부를 파견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교구청 거주 사제가 단 3명에 불과하고, 사무처와 사목국, 성소국과 교육국 홍보국을 한 명의 신부가 겸임하고 있고 관리국장 역시 본당 주임을 겸하고 있는 실정이 이를 잘 말해 준다.
10년 후를 내다볼 때 교구 사제가 최소한 40여 명은 돼야 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교구는 현재 수학 중인 15명의 신학생들이 하루 빨리 사제로 배출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제주도라는 독특한 지역 여건 속에서, 나름의 역사를 갖고 복음화 사업에 열중하고 있는 제주교구는 선교 1백 주년을 지향하며 내실을 다지는 동시에 갖가지 지역 현안들에 동참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을 안고 있다.
그러나 제주교구의 앞날은 희망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우선 교구가 갖고 있는 중단기적인 계획을 봐도 그렇다. 제주교구는 올해 남원공소와 표선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내년엔 노영본당과 화북본당을 신설할 계획이다. 또 99년엔 하귀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1백 주년 기념성전의 기공식도 가질 예정이다. 장기적으론 2010년까지 15개의 본당을 추가로 신설할 계획이다.
제주도 환경 보전과 세속화의 문제는 교회가 존립하는 한 지니고 가야 할 화두인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10월「밤의 도시」라 불리는 신제주에서 거행된 성체거동 행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부족한 사제문제는 사제단의 일치와 화합 측면에서 또 다른 장점으로 살려나갈 수도 있다. 물론 사제 수급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다.
제주교구는 오는 1월 1일 교구 전 사제단과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교구를 성모께 봉헌한다. 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교구를 성모께 봉헌하는 것은 일회적인 행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곧 교회 구성원 모두의 회심과 쇄신을 지향하고 나아가 분단된 민족의 현실, 죄에 물들어 가는 이 세상을 봉헌하고 성모께 의탁하자는 것이다.』 며 이번 행사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선교 1백 주년과 함께 교구 봉헌은 제주교구가 신심 깊은 교구로 거듭 나기 위한 또 하나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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