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외국인 노동자」역사·현황
1990년대 현재 한국의 노동계는 외국인 노동자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산업연수생, 불법 체류자로 한국으로 몰려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있고, 급기야 외국인들이 엄동설한에「인간 대접을 받고 싶다」고 외쳐대며 거리로 나오는 사태(94년 1월 명동)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들이「제발 때리지 말아 주세요」등의 낯 뜨거운 피켓을 들고, 쇠사슬로 온 몸을 묶은 상태로 서울의 한복판에서 절규했던 이유는 무었일까? 이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인간답게 일하고 싶다는 원초적인 염원에서일 거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에서 열외일까? 아직도 일본을 비롯 세계 각국에서 우리들도 그들과 똑같이 불법체류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이들이 수없이 많다. 우리가 우리 땅에서 일하는 이국인들에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하면서 이국에서 우리 민족 노동자들이 올바른 대접 받기를 바랄 수 있을까?
가톨릭신문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해외 노동의 역사를 단편적으로나마 짚어 보고자 한다. 하와이, 멕시코, 러시아, 독일, 일본 등지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던 우리의 이주노동의 역사가 타산지석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주 노동의 시작
한국의 이주노동의 기원은 농업이민에서부터다.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한국의 해외 이주 노동자들은 1902년 12월 13일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된 97명의 노동자들이 인천항을 출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향한 것이 시초이자 이주 노동자의 기원이다.
이를 시작으로 1905년 조선인 1천31명이 멕시코 유까탄에 상륙했고, 1912년경 간도에도 한국인 농업 이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또한 1905년경 한인들은 러시아에도 진출, 한인회를 결성하는 등 대부분 한국인 노동자들은 농업 이민의 형식을 띠고 해외로 진출했다.
또 지난 60~70년대 한국의 많은 노동자들은 독일, 사우디 등으로 진출, 외화 수입의 첨병이 되기도 하는 등 한국 역시 최근까지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외 노동력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더군다나 현재도 일본을 비롯 대만, 싱가폴, 남미, 미국 등에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이 진출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불법체류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기 하와이 이주 노동자
하와이에서의 한국인 노동자 유입 배경은 이보다 먼저 간 일본인 노동자 때문이다. 1902년 당시 하와이 전체 노동자의 73.5%를 차지한 일본인 노동자들의 잦은 스트라이크로 인해 농장주들은 고분고분한 한국인을 채용하게 됐다. 당시 원주민의 월급이 2백50달러였으나 한국인들은 그 반에도 못 미치는 70달러였다.
초기 한인 이주자들의 농장 막사생활은 오늘날 하와이에 있는 한국인들의 생활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들은 농장의 커다란 막사에서 집단 수용생활을 했다.
당시 이들에게는 오락-스포츠 시설이 전무했고, 특히 외부세계나 백인사회로부터 소외된 생활을 했다. 즉 이들은 인간으로서보다도 생산 수단으로 취급 받았다는 게 당시 사람들의 증언이다.
1905년부터 시작된 하와이 이주민 숫자는 근 7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총각이었고 무학이었거나 사회적으로 천대 받는 계층이었다.
이들이 급격하게 발전됐던 계기는 멀리 조선으로부터 사진결혼을 위해 1910년부터 1924년까지 8백 명이 넘는 여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하면서 부터였다. 이 때부터 한인사회는 가정을 중심으로 도시사회로 발전됐고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아무튼 한국의 초기 이주 노동자였던 하와이의 한국인 노동자들의 특징은 가족 전체가 이민을 통해 초창기에는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등 고생을 했지만 현재는 미국 시민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일본에서의 한국 노동자
일본에서의 한국인 이주 노동의 역사는 식민지 통치와 맞물려 형성되었다. 일본의 기업들이 값 싼 한국의 노동력을 원했고 이로 인해 1922년 조선인들의 일본 취업이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초창기 일본으로 취업을 떠난 한국인들은 일본의 경제 불황으로 인해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실업자가 늘어나자 일인들은 한국에서 유입된 값 싼 노동력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 무차별 해고와 인간 이하의 탄압을 하게 됐다는 얘기다.
1920년대를 전후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 노동자들이 임금은 물론 감금 폭행까지 당해가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했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
전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의 노동자들은 일본으로의 진출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대부분 불법체류자인 이들은 일본과 한국의 경제적 차이로 인해 일확천금을 노리고 힘들지만 타국생활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현재도 일본 내 한국인 취업자 수는 5만여 명(1995년 현재)이 넘고 있고 이들 대부분이 일본 내의 3D 직종에서 일하고 있다.
일본 내 한국인 밀집지역은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10여 군데다. 동남아 등 다른 나라 노동자들보다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은 대개 막노동하던 사람들이지만 장사에 실패했거나 직장을 잃고 온 사람이 많다.
대부분 고토부키 등지에 모여 살고 있으나 일본 경찰들은 이들을 묵인하고 있는 실정,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어 이들의 존재를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고토부키는 30여 년 전 일본 노동자들이 밀집해 형성한 인력시장이다. 일본 경제의 발전으로 3D 기피 풍조에 따라 노인들만 남게 됐고 80년대 말 몰려든 한국인 불법 체류자들이 모여사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일본 내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성공하는 것은 드물다. 일본에서 근 5년간 일하고 돌아온 김모씨는『대부분 빠찡코와 술에 빠지거나 사고로 몸까지 망치기 일쑤』라며『누가 일본에 오겠다면 결사적으로 말리고 싶다』고 말한다.
즉 일본 정부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산재 등 혜택을 주고는 있지만 대부분이 불법 체류자로서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가와사키에서 한국인 불법 체류자를 위해 일하고 있는 김 마리아씨는『몸만 성하게 돌아가도 일본생활은 성공한 것』이라며『한국에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데 굳이 일본에서 몸을 망치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며 한국 내 일본 취업 알선업자를 규제해 달라고 말할 정도다.
이처럼 일본 내의 한국인 노동자들은 1900년대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주로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와이의 경우처럼 그 나라에 정착해 살기보다는 시대에 따라 노동 인력이 바뀌면서 지속적으로 저임금 노동시장에 한국인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해외 이주 노동의 역사는 한국의 근대사와 결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와이와 일본은 그 대표적인 나라로 일본은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노동시장으로 각광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 밖에 러시아, 멕시코를 비롯한 남미, 미국 그리고 60년대 이후의 독일 등 한국인들은 끝없이 해외 노동시장을 찾아 나섰다.
초창기의 한국인 노동자들은 거의 대부분 인간 이하의 노동조건 속에서 갖은 고생을 다한 것이 공통점이다. 마치 90년대 들어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노동자들 역시 외국에서 이 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얘기다.
일본에서 10년간 일하고 최근 한국으로 돌아온 김모씨는『물론 외국에서 우리들도 많은 고생을 했다』고 전제하고『그러나 현재 이 땅의 외국인 노동자문제는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즉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같은 경험을 갖고 있는 처지에서 좀더 인간적으로 대해줘야 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결국 칼자루는 정부가 쥐었다는 게 외국에서 취업을 하고 돌아온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일본 불법체류 노동자였던 이재구씨 - “불법 체류자 대우 한국과는 비교가 안 돼”
산재·임금 등 일본 노동자와 비슷한 수준 장애인 판정 받고 일본 정부의 연금 받아
외국에 돈을 벌러 나갔다가 장애인이 되어 돌아온 이재구(39세)씨.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두 달에 한 번 장애연금으로 3천 불(한화 2백40만 원 상당)을 받고 있다. 이씨가 67세가 되거나 죽을 때까지 이 연금 지급은 계속될 예정이다.
이씨는『만약 한국에서 일했던 외국인 노동자가 산재를 당했을 때도 이러한 혜택이 주어질지 모르겠다』고 전제하고『일본의 경우 이국인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기도 하지만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정책이 틀리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난 90년 6월 일본 도쿄 오지(王子)의 건설 현장에 용접공으로 취업을 했다. 92년 2월 15일 설날, 작업을 마치고 콘베어를 청소하던 중 손이 끌려들어가 산재를 당하게 된 그는 이후 근 4년 동안 병원에서 생황을 해야 했다. 다섯 차례의 대수술을 받고 난 후 이씨는 장애인 판정을 받고 현재 일본 정부로부터 장애인 연금을 받고 생활하고 있다.
오른쪽 손이 절단돼 장애 5급 판정을 받은 그는 지금도 산재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다. 오는 2월 6일 재판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야 될 그는 이번 판결을 통해 산재의 원인에 대한 편결을 받게 된다고 한다.
이재구씨는『산재의 원인이 내게 있는가 아니면 회사에 있는가 하는 판결을 받기 위해 현재 법원에 소송 중』이라고 밝히면서『이국인에게 보여주는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선진국다운 모습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병원에 있으면서 줄곧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조합활동을 해왔던 그는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 가입은 아무 나라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자문제는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에서 그가 포크레인 기사로 받은 월급은 한 달 평균 30만 엔.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황금알이다. 이를 이해 많은 한국인들이 현재 일본으로 건너가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이씨처럼 산재을 당했을 경우 정당한 보상을 받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인 불법 체류자들은 월급이 한국보다 월등히 높고, 살기가 편하다는 이유로 일본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씨도 부상 당한 직후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병원에서 받아주길 거부해 2시간 이상을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다행히 양심적인 기업주를 만나, 보상을 받게 됐지만 대부분의 한국 노동자들은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씨는『그러나 한국보다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불법체류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는 다르다』고 잘라 말하면서『산재, 임금 등에서 일본인 노동자와 거의 같은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귀국, 결혼한 이씨는 부인 세실리아씨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고 싶어한다. 기회만 닿으면 신앙을 갖고 싶다는 이씨.『한국은 장애인이 살기 너무 어려운 세상』이라고 말하는 이재구씨에게 이제는 자신에게 짐 지워진 장애인으로서의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되는 또다른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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