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레아 나자렛에서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마르 1, 9). 그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루가 3, 21~22)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모님 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 먹는다』
어릴 때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은 이야기여서 주일학교 초등부 어리이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어린이가 서운하게도 한 명도 없었습니다. 물론 배 고픔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세상이 많이 좋아졌으니까? 하면서도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을까?…. 아쉽기만 합니다.
왜 그렇게도 가난하였는지? 이해가 안 되었는데 요즘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서야 이해가 됩니다.
1950년데 우리 남한사회, 너나 할 것 없이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우리 부모님들, 특히 어머님들이….
평소에는 쌀밥 구경도 못하다가 집안 어른들의 생신을 맞으면 궤짝 깊숙이 숨겨 놓았던 쌀자루에서 한두 되를 꺼내어 밥도 짓고 떡도 만들어 아주 가까운 이웃과 나누던 정겨운 풍습이 눈에 선합니다.
전기불 없는 시골 마을은 늘 컴컴하기만 하고 밤 늦도록 짖어대는 멍멍이 소리만이 한밤의 적막을 깨우는 시간이면 이웃집에 마실 가셨다가 오시는 어머님은 인기척을 내지 않으시고 숨 조이시며 방문을 여셨습니다.
「요셉이 엄마! 떡 좀 들어 보셔유! 말구 어머님도유!」 콩 한 톨이라도 나누어 먹는 구 교우촌 풍습이기에 이웃집 어머님들을 초대한 주인집 어머님은 떡 한 접시를 내놓곤 하였습니다.
「아니유! 저녁을 늦게 먹었더니 떡 생각이 없구만유!」 으례히 어머님들은 배 부르다고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보다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든 자식들이 생각나서 떡 접시에 손 한 번 대지 못하셨던 우리 어머님들…
그리유!…. 애들이나 갖다 줘유!….
기껏해야 한두 개 정도를 허리춤에 감추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어머니 머리에는 「이걸 누굴 준담!」 때 아닌 고민(?)을 하시며 「말 잘 듣고, 공부도 잘하며 심부름도 잘하는 요셉이 줘야지…」 하시면서 발자국 소리도, 방문 여는 소리도 내지 못하시던 우리 어머님들….
큰 방 하나나 두 개로 온 식구가 잠을 자게 되니 어머님은 요셉이는 어디쯤, 말구는 몇 번째, 아가다는 구석에…. 눈 감고도 훤하셨습니다.
방 한가운데에 이불을 펴고 뺑돌아가면서 누우니 이불 속에는 보통 다리만 10개가 넘곤 하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는 희한한 이야기입니다만…).
깨울 처지가 못 되니 어머님은 잠자는 입에다 「쿡」하고 떡을 집어넣으면 「왠 떡」하고 소리를 내거나 일어서면 그날 밤은 잠을 못 자는 날이었습니다.
아무 소리 말고 입에 들어온 떡을 우물우물 먹는 날은 횡재의 날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구요?…
세례자 요한이 당시 사람들에게 베풀던 세례는 죄의 사함을 줄 수 있는 세례가 아니었고, 다만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다는 표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받을 필요가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세례 받기를 원하셨던 것은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하느님의 자녀를 만들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청주 성부로부터 메시아로 인정 받은 반면, 야훼의 종으로서 임무를 다하겠다는 겸손의 서약이었습니다.
이런 예수! 겸손의 예수에게 하느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아무 소리 말고 이제부터는 내 아들의 말만을 듣고 따르라고 하신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응답하는 삶이 예수님 마음에, 나아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눈에 드는 생활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랑 받고 인정 받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야훼의 종, 비천한 종으로 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진 어린 양,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구원사업을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 죽음으로 완수하셨듯이 우리도「일상의 삶」에서 오는 고통과 번민, 절망까지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수 인내할 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것이요,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아들 예수에게 베푸셨던 천상의 행복, 부활의 은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도움을 청하게 될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승진 출세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계십니까?
죽는 시늉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간, 쓸개 빼 버리고 (내 모든 것,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포기하고) 아첨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래야 요즘 세상에서 「지혜로운 처세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느님, 예수님, 마음에 들기 위하여, 눈에 띄기 위하여 언제? 얼마 만큼이나 간, 쓸개 다 빼 버리셨습니까?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오늘 밤에도 자다가 떡 얻어 먹을 만큼 충실한 하루였습니까?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 몇 가지나 하였습니까?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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