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년 섣달에 접어들면서 박해자들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들은「백서」사건을 끝으로 피비린내 나는 이 박해를 끝낼 생각으로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을 불러내 최후의 판결을 내리곤 하였다. 그 결과 1801년 12월 26일(양력 1802년 1월 29일)에는 가장 많은 숫자인 16명의 교우들이 사형을 선고 받게 되었는데, 이제 이야기하고자 하는 홍익만(안토니오)과 김계완(시몬)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홍익만 안토니오는 서울 송현의 양반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나 학문을 닦던 중, 1785년에 명례방(지금의 명동) 김범우(토마스)의 집에 천주교 서적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그 집을 찾아가 서적을 얻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배움이 적었던 탓에 이것이 진리임을 깨닫지 못했고, 그 내용이 요순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 멀리하였다.
그러다가 1794년에 다시 교회 서적을 얻어 본 뒤에는 확연히 깨달음을 얻고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이승훈(베드로), 황사영(알렉산델), 정광수(바르나바) 등과 교유하면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안토니오는 교우들과 긴밀히 접촉하는 한편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고, 교우인 홍필주(필립보)와 이현(안토니오)을 사위로 맞이해 들였다. 뿐만 아니라 1796년에 사위인 홍필주의 집 즉 사돈 강완숙(골롬바)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난 뒤에는 그를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또 주신부가 폐궁인 양제궁을 드나들면서 왕족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를 만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당시 그의 집이 양제궁과 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1801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안산, 양근, 여주 등지에 있던 친지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기찰 포교들이 혈안이 되어 돌아다니자 다시 산곡으로 피신해 생활하다가 이천의 친구 집으로 가서 얼마간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이미 박해자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므로 끝까지 포졸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계완 시몬은 서소문 밖 전동의 양가에서 태어나 1791년 무렵에 최필공(토마스)으로부터 교회 서적을 얻어본 뒤 즉시 입교하였다. 이후 그는 성을 현가로, 이름을 백심(百心 또는 百深)으로 바꾸고 최창현(요한), 정약종, 황사영 등과 교유하면서 교회활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 신부를 만난 뒤에는 여러 차례 미사에 참여하였고, 신부의 거처를 돌보아 주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 누구 못지 않는 항구함과 열정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제 그 열심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되면 피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박해가 일어난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은 그의 집을 급습하였다. 그러나 시몬이 피신하고 없자 대신 부친을 비롯하여 모든 가족을 체포 투옥하였다. 숨어 있던 거처에서 이 소식을 들은 시몬은 즉시 그 곳에서 나와 사실을 염탐하던 중 스스로 체포되는 몸이 되고 말았는데, 이때부터 그의 신심은 크게 빛을 발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그러는 동안 포도대장은 그의 마음을 달래 보려고 갖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순교할 원의가 가득했던 그는 결코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동료들이 숨어있는 곳을 다른 말로 피해가면서 감추어 주었다.
『진실로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고 따랐던 진리를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말도 천주의 가르침보다 달콤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형벌 아래 죽음을 당할지언정 마음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어떠한 것도 이처럼 시몬의 순교신심을 증명해 주는 말은 있을 수 없었다. 또 그와 함께 옥에 갇혀있던 안토니오도 마찬가지로 항구함과 순교의 열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은연 중에 서로를 격려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나가 천상잔치에 합류하게 되었으니,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이 된 하나의 주춧돌은 분명 그들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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