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신자들 가운데는 특히 학문으로 이름이 나 있던 남인의 유명한 집안 출신들이 많았다. 이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경도(가롤로) 또한 그와 같은 집안 출신이었는데, 그의 가족들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오히려 학문보다는 성가정으로 더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미 전주교구에서 시복작업을 추진해 오고 있는 그의 누이 동생 이순이(누갈다)는 유중철(요한)과 동정부부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한 순교자였고, 그의 동생 이경언(바오로)도 형과 누님을 따라 열심한 신앙인으로 살다가 1872년에 옥사로 순교하였다.
이경도 가롤로의 집안에 복음의 씨앗을 가져다준 사람은 부친 이윤하로, 그의 세례명은 최근에 「마태오」임이 밝혀졌다. 부친 이윤하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수광의 후손으로 서울 한동의 인주이씨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남인의 젊은 재사들과 교유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남인 출신인 양근의 권씨 집안, 즉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누이와 혼인하여 딸을 낳고, 이어 1780년에 장남 가롤로를 보게 되었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될 무렵에 부친 마태오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여 온 가족을 입교시키고, 남 못지 않은 성가정을 꾸려 나갔다. 1791년 조상 제사문제로 그의 동료들이 교회를 떠날 때도 마태오만은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러나 1793년에 그가 사망하면서 장남인 가롤로가 모든 집안 일을 떠맡게 되었다.
가롤로는 아명을「오희」라고 하였으며,「경도」란 이름은 이가환이 지어 준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것으로 이름이 있던 그는 성장하면서 가학 계승하여 점차 학문으로 이름이 나게 되었고, 온순하고 너그러운 그의 성품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세속의 영화를 원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열정이 더 많았으며, 따라서 미신행위가 있을 때면 슬기로운 지혜로 위기를 벗어나곤 하였다. 부친 마태오가 사망한 뒤에는 당시의 풍습대로 3년상을 치렀지만, 그것이 신앙을 실천하려는 그의 의지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후 교우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그는 세속의 유혹을 뿌리치는 데 더욱 힘 쓰는 한편 집안에서는 가족들의 신앙이 소홀해지지 않도록 하였고, 아랫 사람들을 인도하면서 언제나 근신하는 태도로 생활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혹을 피하기 위해 곱추 행세를 하면서 하느님에게 그 병을 얻어 주시도록 기원하였으니, 실제로 그는 곱추처럼 되어 주로 집안에서만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외교인 친구들이나 친척들은 미신행위에 참석하지 않는 그를 지목하여 비난을 퍼붓곤 하였다. 이러한 비난은 1797년에 주문모 신부의 허락 아래 누갈다와 요한이 동정부부로 혼인하면서 더욱 거세졌다.
가롤로는 언제나 집안에 있던 교회 서적들을 읽으며 지냈고, 때로는 교우들과 교유하면서 신심을 돈독하게 쌓아 나갔다. 그러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몇 달 뒤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게 되자, 순교할 원의를 갖고 동료들이나 서적이 있는 곳을 대라는 판관의 말에도 전혀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12월 26일(양력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정광수(바르나바), 손경윤(제르바시오) 등과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어느 기록에는 가롤로가 처음의 문초 때에는 마음이 약해졌다고 하였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반대로 그가 사형을 받기 전날 모친 권씨에게 보낸 옥중 서한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오히려 얼마나 굳은 신심을 끝까지 간직하고 순교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저는 비록 가장 큰 죄인이지만, 주님께서는 비상한 은혜를 베푸시어 저를 당신께로 불러주고 계십니다. 저는 이제 통회와 사랑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조금이라도 주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만일 천주께서 저를 이끌어 주신다면, 만 번 죽는다 한들 무엇이 원통하고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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