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당호에서 남한강 줄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양근의 한강개(지금의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곳 대감마을에서는 일찍이 기호 남인의 젊은 재사들이 권철신(암브로시오)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1780년을 전후해서는 천주학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784년에는 그들 중에서 몇몇이 수표교 인근의 이벽(요한)의 집에 모여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게 되었으니, 그 주역의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은 바로 권철신의 아우요 이제 소개하려고 하는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부친이었다.
세바스티아노는 이처럼 학문으로 이름이 있던 집안에서 1768년에 태어나 일찍부터 집안의 전통을 이어 받으면서 과거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부친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회 창설에 참여하게 되자 온 집안이 구원사업에 뜻을 같이 하게 되었고, 청년기에 들어선 세바스티아노도 이전의 공부를 물리치고 하늘의 진리와 영원한 구원을 탐구하는 데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집안은 형제들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우애가 있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으로 인한 시련은 너무나 일찍 닥쳐왔다. 우선 천주교를 사학이라고 여기고 그 교리를 비판하는 데 앞장선 유명한 실학자인 위조부 안정복이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이유에서 그의 사위를 나무라다 못해 마침내 발길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얼마 안 되어 모친이 사망하였고, 1791년 그의 나이 23살 되던 해에는 조상 제사문제로 인해 신해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백부인 암브로시오는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했으며, 부친은 이 박해로 체포되어 형벌을 받은 뒤 유배를 가던 길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세바스티아노는 일시 신앙을 멀리하게 되었고, 오로지 집안을 일으키고 생활 방편을 도모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리고 결혼을 하여 아들 둘을 낳은 뒤에는 집안 어른들의 간청에 따라 자손이 없던 백부 암브로시오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그러나 교우들과의 관계까지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었으니, 1793년에는 그가 조모상을 당하자 황사영(알렉산델)이 문상을 간 적도 있었다.
결국 오랫동안 간직했던 신앙의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이에 그는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 입국하여 활동하게 되자 지방 교우들을 순방하던 그를 스스로 찾아뵙고 이내 마음을 돌이켜 신앙생활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또 양근의 유명한 신자 조동섬(유스티노), 윤유일(바오르) 형제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교리를 전파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인근에서는 암브로시오와 그의 양자인 세바스티아노가 사학에 깊이 물들어 있다고 하면서 배척하기 일쑤였다.
1800년 6월, 세바스티아노는 마침내 이웃에 의해 고발되어 양근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신유박해가 전국을 휩쓸 때까지 감영과 양근 관아를 오가며 여러 차례 심한 형벌과 문초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마음이 약해져 자신의 행적과 집안의 신앙 내력을 자백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어 포도청과 형조로 옮겨져 문초를 당할 때는 다시 천주를 증거하기 시작하였고, 옥중의 동료들과 서로를 북돋우며 순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12월 26일(1802년 1월 29일), 마침내 세바스티아노는 순교의 결실이 눈 앞에 다가온 것을 느끼게 되었다. 관장은 그의 마음이 다시 신심으로 굳건해지는 것을 보고는 고향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는 판결을 내렸고, 이에 따라 그는 즉시 형리들에 의해 옥에서 끌어내져 고향 양근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목이 잘려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이에 앞서 양부인 암브로시오는 배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초를 받던 중에 매를 맞고 죽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세바스티아노의 형제들과 아들들은 고난의 나날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신앙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으니, 우리는 1819년에 이르러 그의 여동생 데레사가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데레사는 바로 1804년 무렵에 조숙(베드로)과 동정부부로 서약하고 15년 간을 지내면서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교회 일에 참여한 교회의 주춧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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