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작했던 제1차 전국 도보 성지순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돌아보면 성지순례뿐만 아니라 순교 성인들의 자취를 더듬는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2백년이라는 기나긴 시간과 공간의 틈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도 그러했지만 주변의 별 다른 경제적 도움없이 본당 일과 병행해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지치고 힘들수록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지금까지 허덕이면서도 손을 놓지 못했습니다.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교회사에 유래가 없는 독특한 교회입니다. 선교사들의 선교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복음을 수용했고 선교사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어떤 일이건 간에 시작은 어려운 법입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 교회는 그 어려움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평화와 구원을 받고 싶어 받아들인 신앙이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인생살이를 더욱 모질게 몰아붙였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굶주림과 박해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알기 전에는 그래도 가족과 함께 한 자리에 둘러앉아 밥은 제대로 먹을 수 있었는데 신앙을 갖고부터는 그나마 조그마한 행복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늘 쫓겨다녀야 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자신의 목숨마저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알 수 없는 건 신앙이었습니다.『천주를 버리겠소』이 한 마디면 살아날 수 있었건만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은 배반할지언정 천주님을 배반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순교 성인들은 그렇게 신앙을 지켰고 또한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순교의 얼과 정신은 그 후손들에 의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풍족한 물질문명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과거 어느 한 순간에 있었던 순교라는 것이 현대의 바쁜 삶 속에서 직접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긴 너무 오랜 공백 기간이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냇물과도 같은 것이기에 한 번 놓친 시간은 다시 되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2백년 교회 역사는 많은 순간들 그 맥이 끈긴 채 가냘프게 이어져왔습니다.
제가 마음 아파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집은 다시 지을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역시 지금 못하더라도 언젠가 다시 할 수 있지만 과거의 역사는 일정 시간이 흘러가 버리면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저 역시 수소문 끝에 소재지를 파악한 생존자가 만나기 이틀 전에 사망한 관계로 귀중한 증언을 놓쳐버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절제한 개발과 증언자들의 사망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는 훼손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더 이상의 방치는 역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역사를 정리하고 발전시켜 다음 세대로 물려주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의무입니다. 저는 작년 9월에 전국에 산재해 있는 우리 교회의 성지와 사적지를 정리하여「하늘에서 땅 끝까지」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자세한 안내를 해 드림으로써 하나의 문화운동으로 발전되었으면 하는 소망에서 책을 썼습니다. 엄두를 낼 수 없었던 1억이 넘는 제작비는 가톨릭출판사에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지원해 주셨습니다.
이제 한국 천주교회의 2백년 역사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또한 전교용으로 사용할수 있도록 그림과 도표, 그리고 지도와 사진으로 꾸민「한국 천주교 역사 부도」를 제작해야 한다는 무거은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출판 원고까지 3억5천만 원이라는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야 합니다. 어느 개인의 지원으로는 불가능하고 한국 천주교 전체 신자들의 관심과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작년에 4백40km를 걸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보 성지순례를 하였고 올해는 강원과 경북을 거쳐 부산까지 4백13km를 순례하고자 합니다. 물론 도보 성지순례의 성금으로 역사 부도 제작비를 모두 충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제의 열정으로 하나의 시도를 한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작년의 예로 보아 개인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전국에 계시는 신자분들의 기도와 격려로 가능했습니다. 눈 덮힌 강원과 경북의 산악지대는 작년에 비해 몇 배의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2월 13일부터 시작되는 제 2차 전국 도보 성지순례에 신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기도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더 시간이 흘러 역사적 사실들이 훼손되기 전에 한국 천주교 역사 부도를 제작하고 싶습니다. 아니 제작해야만 합니다.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았던 선배로서 후손들에게 전해줄 유일한 유산이 아닐까 합니다.
순교 성인들에 대한 공경은 교구와 본당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언제 그분들이 지역을 가지고 다투었습니까? 순교 성인들은 남녀노소 신분을 뛰어넘어 오로지 신앙 하나만을 가지고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아무쪼록 신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2월 13일 오전 11시 명동성당에서의 출발미사에 많은 신자분들이 참석해 주신다면 4백13km의 일정에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들의 가정에 주님의 은총과 순교 성인들의 도움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커다란 행사를 준비해 주시고 도와주신 가톨릭신문사 최영수 신부님과 직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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