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소개한 초기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모두가 시복 청원자인「하느님의 종」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박해를 받으면서 마지막까지 신앙을 증거한 뒤, 천주 대전에 혈세를 바친 적색 순교자의 경우에만 진정한 순교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의 새 교황령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 받으려 노력하다가 선종한 경우나 참된 신앙의 삶을 통해 후손들에게 모범이 된 녹색 순교자나 백색 순교자도「하느님의 종」에 포함될 수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먼저 박해의 희생자가 된 김범우(토마스)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를 순교자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백색 순교자나 증거자로 보아야 하는가는 앞으로 더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으로부터 2백40여 년 전인 1751년, 서울의 남부 명례방에서 탄생한 김범우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고, 또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의 집안은 본래 무관으로 이름이 있었지만, 부친 때부터 역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김범우 또한 부친을 이어 스물세 살 때인 1773년에는 역과 증광시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이 무렵부터 특히 남인에 속하는 젊은 재사들과 자주 어울려 지냈다.
그러던 차에 1784년 겨울에는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요한)의 집에서 있은 두 차례의 세례식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김범우도 두 번째 세례식에 참석하여「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점차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이벽의 집이 비좁게 되자 명례방에 있던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으며, 이로써 수표교의 첫 신앙 공동체는 명례방 공동체로 변모하게 되었다.
새 집회 장소가 마련되자 신자들은 이곳에 모여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고 복음을 널리 전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그들의 모임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785년 봄, 이들의 집회가 형조의 사령들에게 발각됨으로써 이곳에 모여 있던 지도층 신자들이 모두 형조로 압송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때부터 토마스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형조 판서는 집 주인인 토마스만을 감옥에 가두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훈방 조치하였다.
게다가 토마스에게는 유언비어 유포죄를 적용하여 형벌을 가하면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다.
사실 신앙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몇 차례 형벌을 받는다면 토마스가 신앙을 버릴 것으로 생각되었다. 물론 이것은 박해자들의 오판이었다. 토마스는 계속되는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였고, 형조 판서는 화가 치민 나머지 그에게 2천5백 리 유배형을 내리고 말았다.
유배지까지의 먼 길은 형벌로 인해 몸이 쇠약해진 토마스에게는 실로 고난의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의 힘으로 이 고난을 이겨내고 배소에 도착한 뒤에는 이웃에 복음을 전하면서 모든 것을 그들과 나누어 가졌다. 얼마 안 되어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함께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세속에서의 삶을 더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형벌로 인한 상처는 계속하여 그를 괴롭혔고, 이미 쇠약해져 있는 몸은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토마스는 마침내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의 죽음은 앞으로 탄생할 수많은 선교의 행렬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아직도 그의 유배지가 어디였는가, 그가 사망한 해는 정확히 언제인가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사망 시기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있느냐의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만일 유배된 지 얼마 안 되어 형벌로 인한 상처 때문에 사망하였다면 순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면, 또 그것이 우리 신앙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어 왔다면, 우리는 그를「하느님의 종」으로 선정하는 데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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