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시내를 굽어보는 중바위산(승암산). 1912년 완주군 재남리에서 옮겨진 5명의 순교자들 유해와 함께 동정 부부 순교자인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누갈다)가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이제 이곳 치명자들의 합장 무덤은 교우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그래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유중철 요한은 전주 초남리(지금의 완주군)에서 전라도의 사도로 일컬어지던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주 어려서부터 교리의 가르침대로 생활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한편 서울의 유명한 학자요 신자 집안에서 태어난 이순이(누갈다)는 어렸을 때 부친 이윤하(마태오)가 사망하였으므로 편모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누갈다의 모친 권씨는 어린 자식들을 천상의 은혜 안에서 살도록 가르쳤다. 그러므로 누갈다는 언제나 영혼의 구원만을 생각하게 되었고, 모든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14세 때인 1795년에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 이후에는 천상배필의 은총을 온 몸에 받도록 노력하면서 그 분에게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 무렵 전주 땅에서 진리의 사도로 성장해 온 요한도 마찬가지로 평생을 동정으로 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모든 사실을 알고 있던 주문모 신부는 이 둘을 동정 부부로 맺어 주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어느 교회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물론 조선의 양반 집안에서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신부는 요한의 부친 아우구스티노와 누갈다의 모친 권씨로부터 어렵지 않게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들 모두 정결을 지키는 고귀한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797년 전주 땅에서는 희한한 혼배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누갈다는 이듬해 9월 시가로 가서 요한과 동정서약을 하였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최초의 동정 부부로 탄생한 그들은 이후 5년간을 오로지 천상의 섭리 속에 살면서 부모를 공경하고 아래 사람들을 돌보게 되었다. 혼인 후 요한은 누갈다를 언제나「누이」로 호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고귀한 결합은 얼마 안 되어 시련과 단련을 받아야만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요한과 부친 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된 것이다. 얼마 후 부친은 서울로 이송되었지만, 요한은 전주 감영에 갇혀 그 해 여름을 옥에서 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악취 나는 좁은 감옥에 두꺼운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야만 했고, 게다가 목에는 칼이 씌워져 행동마저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요한은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9월 17일 부친 아우구스티노가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처형되기 전날, 이번에는 누갈다와 다른 가족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옥에 있던 요한은 10월 9일(양력 11월 14일) 조정의 명령대로 교수형을 당해 누갈다보다 앞서 천상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무렵 누갈다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았지만, 완전한 인종으로 이를 참아냈고, 오로지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려는 원의만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친정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올케에게 보낸 두 통의 서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이 누갈다의 옥중 서한」이다.
누갈다의 옥중 서한을 보면, 우리는 순교 선조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가르침을 실천하였고, 어떻게 순교의 길로 나아갔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 순교자들의 영성을 종이 몇 장에 담아 놓은 것이었다.『제 죽음을 진정한 생명으로 보시고, 제 생명을 진정한 죽음으로 보세요. 천주를 잃을까를 두려워하고, 성모께 의지하여 마음을 놓으시고, 주님의 어좌가 되도록 힘쓰셔요』
전주 감영에서는 처음 누갈다와 가족들을 유배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유배지로 출발하자마자 길에 있는 사람들에게 열렬히 교리를 전하였고, 사령들은 결국 그들을 다시 옥으로 데려가 사형을 언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누갈다는 마침내 12월 28일(양력 1802년 1월 31일) 박해자의 도끼 아래 목을 드리웠으니, 그때 나이 2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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