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 단동에서 북한으로 드나드는 트럭 운전사들의 목격에 의하면 신의주 거리에는 아사한 어린이들의 시체가 거리에 방치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또 유엔 식량계획 보고에서는 2백40만에 달하는 북한 어린이들이 아사 직전에 놓여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기구의 버티니 사무국장은 북한의 식량 사정은 악화일로에 있어서 이달 내에, 또는 4월에는 고갈될 것이라 합니다.
북한의 우리 동포가 아사 직전에 있다는 소식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같은 민족인데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고도 속수무책입니다. 서로를 가로막는 것은 군사분계선만이 아니고 그보다도 더 서로 믿지 못하고 원수가 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남북이 화해하여 이런 기아로 사람이 죽는 비극을 극복할 수 있을 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 이전에 우리 사회 안에도 화해가 너무나 필요합니다. 계층간, 지역간, 남녀간… 그리고 자신과의 화해가 필요합니다. 화해는 인간관계, 우리 사회의 안정과 평화,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을 위하여 절실한 것인데도 그것은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멀리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화해는 무엇이며, 왜 우리는 이 화해를 얻을 수 없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화해의 정신을 깊게 심을 수 있느냐? 그리하여 남북 사이에 화해가 이룩되게 하느냐? 여기에 통일사목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어 하느님과 화해하고 인간 서로도 원수였던 관계를 씻고 화해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당신을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 막바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상을 보면 요즘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한보사태에서도 잘 볼 수 있듯이 우리는 나와 직접 관계되지 않는 일까지도 남의 일을 두고 욕하고 함부로 헐뜯고 남을 흠집내기를 일삼고 있습니다.
지금은 깊이 생각하면 그럴 때가 아닙니다. 사건 자체의 공정한 해결을 위해서 법대로 조사하고, 공정하게 처리되도록 사회 분위기가 냉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특히 정치인들이 더 합니다. 그리고 언론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치인 언론 더 나아가 온 국민이 욕하고 헐뜯는 상황으로서는 우리나라가 안정을 얻고 평화를 누리기는 힘듭니다.
성 요셉의 대축일을 맞는 오늘, 우리는 마리아에 대한 성 요셉의 태도에서처럼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된 것을 알고 이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 없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요셉도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들을 때는 그것은 큰 충격이요 놀람이요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의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모든 것을 잘 이겨냈습니다. 또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하여 된 것임을』을 알려주고『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받아들여라』하였을 때 요셉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 뜻에 순종함으로써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으시게 되었고 세상의 구원과 화해이신 분이 우리 가운데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 성 요셉의 덕과 믿음은 우리에게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평화와 화해 자체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화해와 평화를 가져 오셨습니까? 십자가가 잘 보여주듯이 당신이 우리 모두의 죄와 그 탓을 대신 지시고 당신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심으로써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느님을 거스리고 당신을 거스려 많은 죄를 지은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청해서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청할 마음을 먹고 있지 않는데도 이미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나라에는 한 맺힌 여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용서를 말할 때, 그것은 오로지 용서를 먼저 청해야 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유태인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한은 대단히 큽니다.「흑야」의 저자 Wiesel라는 사람 역시 용서를 위하여는 그리스도인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해야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용서를 청하기 전에 용서하신 분이요, 그 죄와 탓마저도 당신이 대신 지신 분이십니다.
이 용서가 화해의 바탕입니다. 우리도 참으로 화해를 바란다면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처럼 상대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된 용서의 정신을 우리는 이분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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