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 6일, 전주교구에서 하느님의 종으로 선택하여 시복 작업을 청원한 5명 가운데는 전라도 땅에 복음을 전파한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이 들어있다. 나머지 4명 중에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은 그와 내외종간이며, 유중철(요한)과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장남 내외이니, 일가 친척이 모두 하느님의 종으로 선택된 셈이다.
전주 땅 초남리(지금의 완주군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양근의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런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종들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자신이 일찍부터 얻어온 덕망이 여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부터 전라도의 교회는 차츰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못자리로 자리잡아 가게 되었다.
1786년 초기의 신자들이 사성직단을 조직하면서 아우구스티노도 신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약 2년이 지나서 그는 우연히 교회 서적을 읽다가 가성직단 자체가 성직을 모독하는 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교회 지도자들에게 알려 성직자로서의 모든 활동을 중단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지도자들은 북경 교회에 밀사를 파견하여 가르침을 받고, 아울러 성직자를 이 땅에 영입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후 밀사를 선발하여 북경으로 파견하게 되면서 아우구스티노는 가족들과 함께 그 파견 자금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였다.
아우구스티노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은 제사폐지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한 1791년의 신해박해였다. 이미 교회의 지도자로 이름이 있던 그는 박해 직후에 체포령이 내리자 피신하였으나, 몇 개월 후에는 마음이 약해져 감영에 자수하고 석방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노는 곧 자신의 배교를 뉘우쳤다. 이미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던 그였으므로 순간의 배교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폐지한 뒤 더 열심히 복음을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비밀리에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교리를 배웠으며, 그의 지시에 따라 다시 한 번 동료들과 함께 밀사 파견을 도왔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곧 집안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고 전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은 뒤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 유명한 대박청래사건 즉 서양의 선박을 불러옴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계획이 동료인 이우집에 의해 폭로되었고, 박해자들은 아우구스티노도 이 사건에 연루된 대역죄인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시 마음이 약해져 주문모 신부의 일과 동료들의 활동을 자백하고 말았다. 어느 기록에는 당시 그의 이복 동생인 유관검의 밀고로 전라도 교우 2백여 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결국 아우구스티노와 동료들에게는 능지처참의 판결이 내려졌고, 이에 따라 그들은 9월 17일 (양력 10월 24일) 전주로 이송된 후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집은 파괴되어 연못으로 만들어졌으며, 남은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유배형을 받아야만 하였다.
물론 아우구스티노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의 죄를 은총의 피로 씻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동료들과 달리 그는 최소한의 자백을 한 뒤 입을 다물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후 전주의 교우들은 그를 순교자로 생각하였고, 이러한 구전이 오랫동안 전해져 오게 되었다. 그리고 1912년 그의 시신은 다른 6명의 순교자들과 함께 초남리 이웃의 재남리에서 발굴되어 전주 시내의 중바위산(僧岩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들어 있지 않다고 의심하는 경우도 있다.
분명한 것은 순교에 이르는 길은 그만큼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는 교회사에서 그 유명한 지도자들이 배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고, 그들이 다시 혈세로 몸을 씻고 영복을 얻는 것도 보았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노는 과연 어디에 해당된다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 결론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의 행적이 언제나 교회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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