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이라는 직업 때문에 시험 감독을 자주해야 하는 나는 그 지루하고 따분하기 마련인 시험감독시간을 비교적 진지하게 보내는 비결을 갖고 있다. 비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관습이라고 해야 적합한 표현일지 모른다. 시험지를 나누어받은 학생들이 답안지를 작성하느라고 고몰 해지기 시작하는 십여분뒤에 될수록 차분한 심경으로 그 답안지 위를 스치는 볼펜소리, 혹은 연필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무판책상 위에서 연필이나 볼펜이 종이와 마찰하면서 만들어내는 사그락 소리는 정적에 잠긴 교실에서 펼쳐지는 자그마한 니식의 교향악이다.
똑똑똑똑 처음 찾아뵙는 어른의 방문 앞에서 가만히 노크하는 듯한 소리도 있고 들들들들, 인적 없는 산끝의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도 들린다. 사각사각 백설이 덮힌 들판을 호젓이 걸어가는 발소리가 있는가하면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사락사락, 달 밝은 가을밤, 먼데 여인의 옷 벗는 소리도 있는 듯싶다.
이처럼 조심스럽고 은밀한 소리들은 생각해보면 한달 두달 또는 한 학기 아니면 몇 년 동안 정성들인 공부를 진솔스레 그려내기 위한 숭엄한 고백이 아니던가?
그것은 또한 학생들의 운명을 판결하는 결판의 순간일수도 있겠구나!
이러한 자각은 그 시험시간을 감독하는 나로서도 허술하게 보낼 수는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시험감독시간은 드디어 나에게는 내 특유의 인생철학시간이 되었다.
나는 학생들의 연필소리가 꾸미는 교향악을 들으며 나의 지나온 생활을 반성한다.
학기말 시험 때에는 지나간 학기를 돌이켜보고 학년말 시험 때에는 그 한해를 회고해 본다.
그러나 이 원칙은 가끔 무너져버리고 먼 과거의 추억에 잠기는 일도 많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도록 부끄러운 추억이 있는가하면 빙그레 웃음을 머금게 하는 달콤한 회상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늘 부끄러웠던 사건을 되살릴 때이다.
엊그제 있었던 학년말 시험감독 때에는 나의 회상 중에 문득 내생에 첫 번째의 도둑질이 등장하였다. 그 해는 8ㆍ15 해방이 된 다음해였는데 나는 국민학교 삼학년이었다.
내가 부러운 것은 잠자리가 그려진 일본제「돔보」연필을 쓰는 아이였다.
그 때의 국산연필은 깎으면 부러지고 깎으면 부러지곤 하는 나쁜 품질의 것이었다.
요행히 잘 깎아 연필심을 뾰족하게 다듬어서 글씨를 쓰다가보면 몇자 안 써서 뭉뚝해지기가 일수였고, 가끔 모래알 같은 것이 연필심에 끼어있어서 공책을 찢어먹는 수도 있었다.
요컨대 단단하고도 매끄럽게 쓰여 지는 「돔보」연필은 그 당시 내가 갖고 싶은 첫 번째 물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살던 나의 이종형이 10원만 주면 자기학교에서「돔보」연필보다 더 좋은 연필을 반다스나 사다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몰래 어머니의 경대설합에서 돈10원을 훔쳐서 이종형에게 주었었다.
그 전날에도 연필 값을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나는 도둑질로 밖에는 돈을 만들 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 며칠 뒤 이모님 댁에 가셨던 어머니가 형으로부터 연필 6자루를 받아오심으로써 나의 도둑질은 백일하에 폭로가 되었다. 종아리에 퍼런 용트림이 새겨지도록 매를 맞은 나는 그때에 정직한 삶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뒤에 내가 또 도둑질을 안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자신이 없다. 가령 군대생활 졸병시절에 내 물건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부득이 남의 것을 슬쩍 가져다놓고 이른바 관물검사를 받은 적이 여러 번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벌써 삼십년이 넘는 옛날 사건이 왜 그 시험감독시간에 회상되었느냐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지난 한 해 동안 나의생활이 경망스럽고 교만하였던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이를 경멸한 적이 있었고, 그리고 그 값으로 도리어 남들로부터 경멸을 받아야만 하는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한 불명예속에서 나는 지금 그 수모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쓸 수없는 것이 한없이 설글프다.
그렇지만 그 수모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나에게 인생을 좀 더 겸허하게 살라고 하는 사랑의 표현으로 나를 부끄러움 속에 밀어 넣으신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들 심령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항상 우리의 귀에다 진실스런 사랑의 말씀을 속삭이신다. 그 진리의 음향이 귓전에 맴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그 나약한 의지는 또 무엇인가?
시험을 마치는 시간이 가까와오자 나는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답안지를 잘 쓴 학생들은 벌써 하나둘 교실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하느님 앞에 내놓을 내 인생의 답안지 위에 교만과 허욕을 그리고 있었다다니!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양심의 교향악은 내얼굴을 점점 붉게 물들이는데 나는 하느님께 드려야할 고백의 첫마디를 꾸미려고 하는가?
『하느님 새해부터는 더욱 열심히 겸허를 배우겠습니다. 교만과 허세의 찌꺼기를 버리겠습니다』
아! 올해에는 지각생처럼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겠다.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