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로에는 1674년에「일반적인 막대에 대해 논함」이란 저서를 냈고 요한 니꼴라오는 1694년에「원천을 발견하고 야곱의막대로 보물을 찾는 방법의 기술」이란 저서를 펴냈다.
스코트 신부는 1662년에「지하에 관한 재미있는 물리학」이란 저서에서 추에 대해 논했으며 레냘트 박사는「붉은 용」이란 그의 저서에서 막대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세밀히 논했다. 바실·발렌틴과 세바스틴 문스터가 연구 발전시킨 후부터는 광부들이 광맥을 찾는데 점막대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레냘트 박사에 의해 1932년「아비뇽」에서국제 과학점술가들의 회합이 열렸다.
이 회합에서 논의된 것은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도록 점막대家들과 점추가들에 대해서였다. 이 회합에서 라울·페른왈드 박사는『지하의 물길을 투시하여 발견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언제나 많은 반대자들이 있었으나, 「프레브그」의 광산과인 삭스대학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그 학교에서는 광산업의 지도자인 크리스토피·스켄버그를 받들고 있었으며 그는 손에 점을 치는 추와 점막대를 항상 쥐고 다녔다』는 말을 인용했다.
1600년대에 제일 유명한 과학점술가들 중에는 벨지움 남부지방 출신으로 남작인 요한 차틀러와 그의 부인 말찌나를 들 수 있다.
이 두사람은 지하자원을 찾는데 전문가였다.
지하자원을 찾는 방법은 제각기 다른 쇠로 된 7가지의 점막대를 이용했다.
그들은 독일 스웨덴 이태리 불란서등지에서 많은 지하자원 광맥을 찾았다. 그들 부부는 불란서의 광산관계 총 책임자였던 데피아의 초청으로 불란서전국을 탐지할 수 있도록 국회의 인준을 거쳐 왕으로부터 허락받기도 했다.
또 그는 불란서에서 부광무국장까지 지냈다. 이렇게 정부의 신임을 받고 또 보호로 받았다.
그러나 한 때 크게 신임받던 그들이 차차 불란서의 서해에 위치한「브러타느」지방의「부이쏭」과「로셰모리스」사이의 산림지대에서 광택을 찾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이 일을 할 때 재판장으로부터 점쟁이로 취급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무것도 아닌 방법으로 땅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더군다나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판단한다는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풀려나와 불란서를 떠나서 독일로 갔다.
독일서는 황제로부터 광산업의 고문과 위원의 자격을 받기도 했다. 그 후에 다시 광산업자들과 함께 불란서로 돌아와서 루이 13세로부터 불란서 내에서 광맥을 찾을 수 있는 권한을 허락받게 되었고 국회의원들의 추천까지 받게 되었다.
그들은 불란서 내에서 광맥을 찾기 위해서 30만 프랑이나 되는 사재를 써가면서 150개의 광맥을 찾아냈다. 요즈음도 꼭 같은 실 예들이 있지만 그때도 능숙한 과학 점술가나 되는 듯이 나서고 시기질투하고 또 그들 부부를 나쁘게 판단하고 전쟁이라고 헛소문을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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