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몇년전 오랫동안 생활했던 행려환자 구호소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하고 싶어진다.
지금은 결핵환자 80명에 수녀님 혼자 맡고 있을 정도로 기반이 잡히고 환자들 모두 한 가족처럼 따뜻한 사랑의 분위기를 만들어 해마다 늘어만 가는 영세자들!
그들은 모두 얼마 전 새로 지은 작으마한 성당에서 끊임없이 기도드리며 새로 오는 환자들에게 그들 스스로 하느님을 가르치기도 한다. 본 가을 여름이면 뜰 앞의 정원엔 갖가지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성당입구에 세워둔 소화 데레사상 앞에서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은 그 어느 때의 실의에 찬 비참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1969년 7월 28일 부산 장림동에 자리 잡고 있는 행려환자 구호소를 부산시로부터 우리 수녀회가 인계받은 후 우리식구 모두가 동원되어 드나들며 그들을 보살폈다.
그때 난 진료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소임이 끝난 후 집에 오니 수녀들이 안 계신다.
모두 장림동에 가신 것이다. 나라고 빠질소냐, 나도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그 곳에 갔을 때 정말 나의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중환자중 대부분 이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그들의 기본병인 결핵 외에 눈병 피부병 등 갖가지의 질병 속에서 벌거숭이로 즐비하게 누워있어 마치전쟁터에 쓰러진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와도 같았다. 가끔 꿈틀거리며 신음하는 소리만이 그들이 아직 생명이 붙어있음을 증명할 뿐 먼저가신 수녀님들과 우리 신부님까지도 두 팔을 걷으시고 피부투성이 상처의 고름을 닦아주신 후 그들에게 목욕을 시키고 계셨다.
한참 멍청히 서서 바라보던 나도 용기를 내어 같이 거들었지만 처음이라 온몸이 조여들고 내 몸도 근질근질 한 것만 같았다.
한 달 동안 시간이 나는 대로 드나들며 그곳 일을 돕던 나는 어른들로부터 그곳에 아주 가서 일하라는 분부를 받았다.
그때『네』하고 대답은 했지만 마음속으로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수녀원과 동떨어진 그곳、초라한건 물、지나가는 행인들이 그 집앞을 지나갈 때 결핵이라는 선입감과 지독한 냄새 때문에 일을 가리며 뛰어간다는 그 집、하지만 그 근심도 잠깐 수십 아니 수백명의 환자들이 주님을 모르고 신앙을 가져볼 기회도 못가진채 종말을 고하는 그들의 영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책임을 져야한단 말인가?
정해진 숫자가 없고 자리야 있든 없든 행 길에 쓰러진 사람이면 무조건 실어오는 시청차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들을 치료하고 목욕을 지키고 옷을 입히고 내 한 몸을 열개로 쪼갠다 해도 할 일을 다 못할만큼 난 그때 열의에 가득 차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랴. 지금이야 그곳에 결핵환자만 수용하고 있지만 그 당시엔 결핵이외 정신이상자 화상환자 불구자등 각양각색의 집 없는 환자들이 입소되어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제일 나를 당황케 하는 것은 그들이 쉽게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사람 죽는 것을 한번도 본 일이 없었던 나에게 하루에도 2명 3명씩 죽어가고 그들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삶에 대한 허무를 처절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영혼이라도 놓치지 않을 새라 임종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드리며 대세도 주고 수녀님들이 환자들의 시체를 염하실 때는 난 사제복을 만들었다.
또 물 사정은 나빠서 식수도 모자라니 매일 옷에다 싸버리는 그들 옷을 빨기 위해 갈대밭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 나르기도 했다.
나 외에 윗수녀님 두 분이 같이 계셔서 난 책임감은 덜했고 걱정도 적었지만 양심적으로 느끼는 사명감과 긴박한 현실과 부족한 일손으로 동분서주했다.
늦게까지 일을 마치고 들어간 후 한잠 깊이 들었을까 뚜웅하고 울리는 시청차 특유의「크락숀」소리에 또 다시 일어나면 혼수상태에 빠진 행려자를 싣고 온다.
때로는 약물환자 전과자 주정뱅이소매치기 그러나 이상한 것은 처음 올 때 그렇게도 험악하고 무서워보이던 그들의 인상이 하루하루 달라져 가는 것이다.
내가 더욱 마음 아팠던 것은 자기들끼리 사랑이 없는 점이었다.
옆 형제가 죽건 말건 밥을 먹건 안먹건 자기 외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으며 피를 토하고 쓰러진 환자의 피를 닦아주는 우리에게 무슨 궁상이냐는 듯 비웃는 눈초리로 우리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우리가 며 칠 동안 그렇게 열을 내다간 모두 가버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난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심어 사랑의 열매를 거둔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꾸준히 인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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