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그 당시부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 이후로 이 사건을 토대로 세계사가 바뀔 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는 전 인류의 센세이션이 되어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의 출현과 그 발전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분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중요성을 띠며 중요성을 띠기 때문에 의문점도 많은 것이다.
죽음은 우선 순수 인간적인 것이고 부활은 초인간적이며 순수 하느님의 권능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교회가 출현한 초대교회시대에 제일 먼저 문제가 되었던 것이 그리스도는 오로지 사람이냐 아니면 순전한 하느님이냐 하는 문제로 진통을 겪었다.
전자를 네스토리우스파라하고 후자를 그리스도 단성설이라 하는데 이 소음을 교회는 공의회로써 결말짓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신성과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한 몸에 신비적으로 합일시킨 그리스도 神人論으로 규정지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마음에 늘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특히 인생부조리에 시달리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원욕을 잘 채워주고 부조리를 일시에 척결할 수 있는 하느님이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에서 우선 인간임을 보여주시려고 무척 애를 쓰셨다. 예수님의 언행록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신성과 인간성이 번갈아 나타나있음을 알 수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다닐 때 그들은 분명히 우리와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이 당시 절세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처럼 로마대제국의 황제보다도 더 위대한 영웅적인 왕권을 휘둘러주시기를 바랐었다. 메시아이신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때에는 천상만군을 거느리고 구름을 타고 와서 천사들의 나팔소리도 요란한 가운데 악인들을 처벌하고 의인들을 데려가신다 하지 않았던가.
예수께서 전교생활하시는 3년 동안 그들은 숱한 기적을 보았다.
온갖 종류의 병신을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시고 분명히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시고 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며 그 강력한 왕국의 초래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타볼산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신적인 영광이 다 어디로 갔느냐.
스승의 말년이 너무나 허무하게 너무나 인간적으로 인간도 형편없는 인간으로 사형에 처해질 때 제자들의 절망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과 희망이 흔들렸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믿음도 희망도 예수님의 고난을 되새기며 흔들리게 되는 때가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믿는 가 더 잘 되자고 믿는 것이 아닌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인간. 부조리를 믿음에서 해결하자고 믿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의 힘만이 이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고난은 복음서에서 읽는 그대로이지만 대체로 다섯 단계로 나눈다.
첫째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부터 시작된다. 말하자면 송별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당신의 비참한 최후를 직감한 제자들이 슬슬 당신을 떠나가는 슬픔을 맛보는 송별회였다.
둘째는 갯세마니 동산에서의 우민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인간은 얼마나 발버둥 치는가 이 죽음의 전야를 하느님과의 기도적 대화로써 극복하는 것이다.
셋째는 유다스의 반역과 수제자 베드로의 불신하는 배반발언이다.
네째는 예수님의 재판이다. 제자들은 아직도 무슨 큰 기적이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뒷전에 숨어서 재판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세찬바람에 깜박거리던 촛불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것은 끝났다.
예수의 고난의 마지막 단계는 말할 것도 없이 갈바리아 산상에서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이제는 제자들도 거리에 가볼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은 끝장이 아닌가.
지금까지 허망 된 희망을 품고 댓가 없이 일생을 망쳤고 헛수고 만했나 싶었다.
일류를 구할려면 왜 하느님의 위력을 발휘하여 눈앞에서 악인들을 쳐부수며 정의의 왕국을 당장 건설하지 못하는가. 천상군대는 다 뒀다가 어디에 쓸려고 그러는가.
왜 하필이면 그 참혹한 고난으로 사람을 실망시키는가. 이 모든 의문점을 알아듣기 위하여는 복음서를 다시 곰곰이 읽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그신성과 인성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참된 하느님이시어야 믿을만하다.
만일 예수님이 공자나 석가모니처럼 단순한 사람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성인이라 하더라도 단순히 사람이라면 온 인류가 모든 것을 걸고 믿을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이심을 누누히 알려주고 증명하는 줄기를 복음서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완전히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도 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과연 그리스도의 신성은 복음서에 보면 언제나 인간성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것은 탄생하시는 순간부터 죽음의 마지막순간까지 역력히 나타나있다.
인간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가난과 고통이다. 인간이 가난과 고통에서 해방되려하는 그것자체가 어느 모로 보면 인간적인 것에서 초탈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구원된다는 것은 이 인간적인 것에서 구원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과 고통이 없는 상태가 되는 그 자체보다도 가난과 고통에서 초탈하려는 노력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구원의 힘을 가지게 하는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는 분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자선가일 수는 있어도 구세주일 수는 없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가능한 모든 것을 그 밑바닥까지 살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고 따를 수 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열광도 크지만 우리로서도 노력했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것이다.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