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회내서 한국인의 意識構造에 대한 반성과 계발을 위해 자기 스스로가 혹은 외국인의 눈을 빌어 다각도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우리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한국인의 고유한 意識構造를 지니면서 동시에 신자로서의 또 하나의 그것을 가지게 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가톨릭교회 신자들의 의식구조 내지 靈性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점이 될 만한 것을 찾아내어 반성할 점과 계발해야할 점을 다함께 모색해 보고자한다.
(一)個人救靈爲主
이는 이 신앙생활을 자기개인의 영혼을 救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 전날 要理問答 제1조에 나오는「사람은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났느니라.」하는 구절에서부터 시작된 사상인 것 같다. 신앙이 자기영혼을 구하게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영혼을 구하는 데만 위주 하는 것은 문제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개별적으로 구원되기를 바라시지 않고 한 백성으로서 즉 공동체적으로 구원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강조한 교회헌장 (9)의 정신에 비추어볼 때 자기영혼만의 구원 혹은 자기영혼의 구원 만에 치중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자기영혼만의 구원 사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副産物을 낳게 된다.
①집요한 個人主義 : 한국인 고유의 개인주의사상의 바탕에서 종래의 교리교육(전기요리문답)이 잘못 받아들여짐으로 인해 개인구령주의의 의식이 뿌리깊이 박혔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인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라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共同體의 정신이 결여하게 됨은 자명한 일이다. 교회 역사상 오늘날처럼 교회의 공동체성 즉 一致를 강조하는 때가 없었다. 특히 한국교회는 먼저 교회 안에서부터 개인주의사상에서 共同體意識에로의 「우리」의 의식구조의 전환이 긴요한 것 같다.
②天堂至上觀念 : 구령위주의 근본적 태도와 구원은 곧 천당 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결과로서 천당지상의 관념이 굳어졌다.
그러나 天堂이라는 번역용어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의 이미지를 혼란하게 만든 요인이 된 것도 같다. 그것은 이 地上이 아닌 하늘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장소의 개념을 깊이 넣어주었다. 오늘날 우리말 성서에도 하느님의 나라 또는 하늘나라(天國)로 표현하고 있다. 또 하늘나라는 성서 여러 곳에서 언급되었듯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는 바로 진리와 자유와 평화와 사랑 등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 지상에서 하늘나라의 상태를 이룩하는데 먼저 마음과 힘들다해야겠다.
③自己中心主義 : 성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일 사랑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는 열심한 것 같으나 이웃사랑에는 냉담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하느님과 자기와의 縱的관계는 친밀하나 자기와 이웃과의 橫的관계는 소홀하다는 것이다. 이웃사랑이 곧 하느님사랑 일진대 자기중심적 心性에서 하느님중심과 他人中心의 靈性으로 생활태도를 改新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찬의 특징인 것이다.
(二)閉鎖性
가톨릭교회는 文字그대로 보편성을 과시하면서도 실상은 외부에 대해 페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온지 오래이다. 그것은 지난번 제2차「바티깐」공의회의 개회식에서 교황 요한 23세께서 「베드로 대성전의 문을 세상을 향해 활짝 열어라」고 외치셨다는 한 말씀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마음을 열어놓지 않고 독존적이고 폐쇄적인 자세를 취해 온지 여러 世紀를 지냈었다.
이러한 천주교회의 전통사상이 우리한국의 풍토에 접했을 때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국제적 상황에서 開放的 進取보다는 閉鎖的 自衛에 급급하는 정신풍토 속에 살았던 한국신자들은 더 한층 그 폐쇄의식을 증대하게 하였고 더욱이 장기간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은 한국교회의 역사적 유산으로 오늘에 이르러서도 교회 밖의 社會現實을 외면하는 현실회피의 기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바티깐」에서 강조하는 교회의 현실참여에 회의와 주저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한국 신자들의 폐쇄의식은 교회 안으로만 파고드는 內向性에 집착한 나머지 사회와 세계를 지향하는 外向性이 결여되어있다.
(三)依存思想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말할 때 대개는 事大主義思想을 떼놓지 않는다.
사대주의는 곧 依存思想과 상통한다.
이 사태주의나 의존사상이 가장 깊은 뿌리를 내린 것이 李朝시대 이후로 볼 수 있는데 이때에 천주교가 中國을 통해 프랑스선교사로부터 한국에 도입되었다. 이때까지는 仏敎와 儒敎가 각각 先後해서 印度등으로부터 전래했다. 천주교도 다 같은 外來宗敎이지만 그것은 같은 동양의 종교가 아닌 서양에서 온 종교이기 때문에 한국풍토에 정착하기까지에는 수많은 파란을 겪었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한 특별환경에서 외방선교사들은 교리교육면에서나 선교사목면에서나 만사를 일방적으로 支援하고 注入하고 保育하는 선교방식을 취하게 됐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는 무조건 外援에 의존하고 선교사에 의존하는 습성을 익히게 됐다. 이 습성이 2백년을 지낸 오늘날까지도 한국교회의 意識안에 깊이 잠재하고 있다.
그 결과는 신자들의 自律性과 責任感이 幼兒의 영역을 면치 못할 만큼 유약하며 아직도 외국원조에 기대는 경향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성직자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깊은 존경심을 갖는 것은 마땅한 일이겠으나 그 존경심보다는 오히려의 존심이 더 큰 것같이 느껴진다.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은 성직자에 一任하고 依存하는 미성년자의 위치에 스스로 머무르고 있다.
(四) 聖事偏重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와의 차이에 대해 전자는 聖事中心이오 후자는 聖事中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이것은 물론 정확한 표현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실상을 찌른 것은 사실이다. 우리교회는 미사를 중심으로 한 七聖事와 준성사 기타 전례가 있다. 이 성사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고 전례는 사도시대로부터 계속 전래되는 거룩한 전통이다.
이들을 계승하여 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집행하는 것은 교회의 막중한 의무요 은총이다.
그리고 또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가 성사에 못지않게 신앙의 源泉이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가톨릭교회는 과거성서의 존엄성에 대한 지나친 외경에서 일반신자에게 성서읽기를 권장하기 보다는 도리어 경계하는 태도를 취해왔다.
이로 인해 신도들은 성서에 대한 인식과 공부는 도외시되고 오직 신앙은 성사에 참여하는 것만이 필요하고 충분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성사는 반드시 형식과 의식을 갖추기 마련이므로 성사참여가 하나의 형식적 儀式에 흐르고 그것이 표시하는 意義와 은총이 체험되지 않는 하나의 습관화 기계화가 될 위험성이 없지 않다. 이것은 결국 성서연구 부족으로 신앙의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교회나사회안에서의 사랑의 활동을 통한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오직 성사가 의식을 통한 신심만을 위주로 하는 偏重型이 될 우려가 적지 않다.
특히 한국 신자들은 한국의 원시종교인 샤머니즘적 잔재의식이 깊이 깔려있기 때문에 교회의 여러 가지 전래예절이나 행사 가운데 한국고유의 샤마니즘적 요소와 쉽게 일맥상통될 위험성마저 있는 것이다. 한국의 外來宗敎인 불교와 유교가 한국 땅에 수용정착 될 과정에서도 이 땅의 샤머니즘과 習會된 흔적이 많이 볼 수 있음에 비추에 이러한 전철을 교회는 밟지 말도록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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