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생명의 계절과 함께 우리는 다시 부활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하신주님의 은총과 빛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히 내리기를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신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음을 선포하고 축하하려 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분이 우리 안에 살고 현존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려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진정한 대면에서 우러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관습적인 기도문처럼 우리머리와 입에 밴 것입니까?
(中略)
이제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떠합니까?
한마디로 진리는 감추어지고 정의는 너무나 무력한세상입니다.
널리 세계적으로는 강대국이 약소국의 생존권을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선의의 사람들과 무고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독재적 강자들의 압제 하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무차별하게 학살당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있어도 어느 누구도 구해주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과 신음소리는 침묵 속에 사라져갑니다.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부정의 냄새가 물씬거려도 우리의 코는 이제 만성이 되어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하게끔 되었읍니다. 날이 갈수록 우리는 현실과 타협하여 우리내부의 양심의 소리, 진리로 향한 갈등을 망각해가고 있읍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은 예수수난의 비참과 자신들의 무력함을 체험한 끝이 실망과 체념, 좌절에 빠져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의 상태와 흡사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무참히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실의에 찬 나머지 각자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지려 했읍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의가 무력하게 시들어가고 불의가 판을 치는 모습을 보고 우리역시 실망하고 자포자기하여 흩어져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위한 투쟁을 중지하고 현실과 타협하며 나 혼자만의 무사와 안일에 잠들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음과 어두움을 이기고 생명과 빛으로 부활할 것을 믿지 못한 것처럼 우리 역시 정의와 진리 참된 인간성의 부활이 이 땅에 있으리라는 것을 오늘날 믿기 힘들어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부활신앙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까? 예수께서 진실로 부활하시고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부활신앙을 가진 후의 제자들처럼 하느님의 나라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생명의 나라를 만백성에게 전하려는 세찬 열의가 불타야 합니다. 어떤 환난이나 박해나 굶주림도 어떤 위험이나 총칼도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도 바오로의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로마8ㆍ31~39참조)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심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믿음과 열의만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오늘의 현실 속에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이는 바로 부활의 희망입니다.
엠마우스로 낙향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난 후 그날 밤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동료들에게 예수부활을 열심히 전하고 기쁨을 나누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결코 우리자신만의 무사안일 한 생활 속으로 낙향해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한사람에게라도 더 예수님의 부활을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신 그분의 부활을 온갖 힘을 다하여 전할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그렇게도 무참히 짓밟히신 예수님께서 상상조차 할 수없는 방법으로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을-가장 불가사의하면서도 가장 기쁜 사실을-한사람에게라도 더 전하려고 성신강림 날 첫새벽부터 외쳤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모든 실망과 체념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지금 이 현실에서 무참히 난도질당하는 쓰러져가고 있는 정의가 결코 죽어 없어지지 않고 하느님의 힘으로 살고 있다고 외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정의는 소리 없이 쓰러져가는 의인들안에서 하느님의 힘으로 반드시 찬란히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그분의 진리, 그분의 정의, 그분의 사랑도 부활했습니다.
밤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떠오르는 새날의 태양처럼 죽음의 어두움을 깨고 그리스도의 빛은 다시 밝혀졌읍니다.
다시금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분의 끝없는 평화를 기원합니다.
1978년 부활대축일.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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