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할말이 별로 없고 쓸것도 별로 없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고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실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 흔히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인류의 구세사업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무참히 죽으심으로 그쳤다면 역사중 한인물이 이러저러한 비극적인 인생을 살다가 죽어갔다는 작은 사실에 그쳤을 것이다. 아마 역사가들은 영영 기억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 부활은 사기극이 아니로 생생한 사실이었기때문에 인류역사의 큰 사건이 되었고 그리스도교라는 큰 종교의 힘이 된 것이다.
기원전 552년 중국 노나라에서 공자가 태어났고 일생을 학문을 닦고 도를 세웠다고 하면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그분의 학과 교가 훌륭하기 때문에 후세는 그분을 존경하고 숭상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분은 역시 죽었고 죽고서는 그만이었기 때문에 온 인류가 모든 것을 걸고 믿을 수 있는 분은 아니다. 그분이 연마한 학과 세워놓은 교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성인으로 모시는 것뿐이다. 그분이 태어날 때에 어머니가 용꿈을 꾸었다는 설화는 설화로서 받아들일 따름이다.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태어나 29세에 생사해탈의 묘법을 얻고 제행무상의 묘리를 깨우쳐 중생에 폈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그 교실에 경탄하고 인생의 모든 욕심에 헤매는 사람들이 차라리 그길로 가보려는 힘을 내볼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열반으로 표현되는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윤회재생설이 있지만 그것은 아무도 실지로 보여주지 못한 풀라토닉한 내세관일 뿐이다.
이 두 분에 비하면 예수ㆍ그리스도의 일생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인간적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나 생활이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그 인생기에 나오는 기적의 이야기들은 복음서를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는 허황된 헛소리 같아서 믿어지지가 않는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를 미친 사람 취급을 하였다.
왜냐하면「나」즉 너희가 지금 여기서 보고 있는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 그렇게 말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 얼빠진 우매한 어부들과 세리들만이 이 말에 솔깃했을 뿐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을 때에 청중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런 정도의 교설은 웬만한 사람이면 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말이 아닌가.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들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려라, 건담도 버리고 부모나 처가까지도 버리라』고 했을 때에 제자들은 즉석에서 반발하였다.
그런 것을 어떻게 하라느냐고. 그들은 예수에게서 순수 인간적인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경을 눈뜨게 하고, 절룸발이를 곧바로 걷게 하고 중풍 걸린 자를 멀쩡하게 만들고 벙어리를 당장에 수다장이로 만드는 것을 보고는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그것을 발판으로 스승께서 현세의 영웅으로 나타나시기만을 기다리며 희망에 부풀어있었다. 예수님이 언제 나라를 세우시느냐고 자꾸만 졸라댔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제자들이었는지라『나는 악당들에게 붙잡혀서 죽는다.』고 예언했을 때 그들은 펄쩍 뛰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예수님께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복음서를 처음 읽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그 어머니는 예수를 낳은 다음에는 영원토록 처녀의 몸이라고 한 것을 읽으면 도저히 믿지를 않는다.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사람이 유다의 땅에서 태어낫다는 역사적인 사실만을 정직한 역사가들이 받아들일 뿐이다.
한마디로 예수가 태어났고 이렇게 저렇게 살다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교는 성립되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을 무수히 듣고 별의별 기적을 다 목격한 예수당시의 사람들이 예수가 결국은 인간들의 손에 재판을 받고 십자가형틀에서 목숨을 거둘 적에 예수의 반대자들은 골치 아픈 사람을 치워버린 승리감에 안심하였고 예수를 따르면 제자들은 일생을 바쳐서 걸었던 희망이 일시에 사라지는 아찔한 순간을 맛보았을 것이다.
이제 이 모든 인간적인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의 뜻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은 갑자기 기운을 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일생의 모든 언행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되살아나면서 그 진의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분이 과연 하느님이었다.』고.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여기서부터 생명력을 얻고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이렇듯 중요하기 때문에 살과 살을 맞대고 볼 수 있게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제자들은 사기극을 벌일 능력조차 없을 만큼 실의에 차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조차 믿으려들지 않았으니까. 석가모니의 제자들도 석가가 열반한 후 부활의 사기극을 벌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시 정직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기극을 벌이지 않았다. 공자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참뜻을 깨우쳐주고 우리의 믿음을 실질적인 믿음으로 굳혀준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되다』고 하신말씀은 바로 이러한 뜻으로 하신 말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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