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은 바람이 창을 두드리는 밤의 일이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자꾸만 환자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오늘은 그렇듯 중한사람이 없었는데 식사도 다 잘했고 하긴 밥 잘먹고 잠자다가도 피를 토하고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심할 수는 없다.
난 다시 일어나 환자실 복도를 한 바퀴 돌았다. 아무 이상이 없다.
그러나 잠자려면 또 급한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가뜩이나 무서움이 많은 난 달달 떨기 시작했다.
어제 죽은 희야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바람소리와 합께 계속 밤새껏 들리는 그 소리.
나중엔 얼굴에 식은땀이 났다. 몇 번이나 병실을 돌아도 아무 이상 없는데 그렇다고 곤히 주무시는 수녀님을 깨울 수는 없었다.
더구나 무엇이든 혼자 꽁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난 밤새도록 한잠도 못났다.
1호실에서 9호실까지, 죽은 환자의 얼굴 하나하나가 떠올랐다.
46명 47명 더 기억할 수 있었다.
난 벌떡 일어났다. 신경과민에 걸렸나, 산에서 짐승이 내려왔나…
이튿날 아침 다른 수녀님께 이야길 하니 어제는 중환자도 없었는데 아마 수녀님이 너무 피로해서 그런가보니 오늘부터 며칠 동안 푹 쉬라는 것이다.
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난 물론공상과 상상력이 풍부하고 소극적이고 또 내성적이고 필요 없이 세심하고 예민하고 그 밖의 여러 가지 나의 결점을 들어왔지만 있지도 않는 소리를 들을 만큼 내 정신이 약하지는 않았었다. 무슨 소릴까?
그러나 그날오후 비로소 그것을 풀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낮에도 그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수녀님 이리와 보셔요.
또 들려요.
수녀님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주시하신다.
가만히 계셔보셔요. 들리지 않아요. 글쎄 저게 무슨 소릴까
잉~잉하는 그 소리.
『아 알았다. 그건 저 굴뚝위에 바람개비가 바람이 부니까 들어가는 소리에요』
과연 그 수녀님은 나보다 통찰력이 대단했다.
그날 수녀님께선 당장 아저씨를 시켜 바람개비를 떼어 버리셨다.
난 지금도 바람 부는 밤이면 그 밤이 문득 생각나 나 혼자 픽 웃는다.
그땐 환자의 신음소리가 항상 내 머리에 여운처럼 남아있었으니….
여운은 정말 좋고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우리에게 남기신 여운을 안고 좀 더 낭비없는 생활을 해야 할 텐데…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