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이었다. 임시로 며칠간 와서 일을 돕던 동료자매가 병실에 갔다 오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울음을 터뜨린다.
『수녀님 왜 그래요?』
『1호실 기성이가 글쎄』
『아니 기성이가 어쨌다는 거예요?』
수녀님은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
『먹지는 않았어요.』
『휴우 …』
난 안도의 숨을 몰아쉰 후 1호실에 내려갔다.
기성이는 18세 된 남자아이인데 복막염으로 시립병원에서 수술한 후 상태가 안 좋아 계속 구호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아이였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기성이는 반항심 가득 찬 얼굴로 『이런 것 저 같은 놈에겐 필요없어요. 』하면서 교리시간에 준 상본과 묵주를 돌려준다.
『그래. 다음 마음 내킬 때 다시 주기로 하지』난 그에게서 상본과 묵주를 다시 받았다.
『그건 그렇고 기성이 약은 어디서 난거지?』
『그건 내 상비약인데요.』난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성이 왜 그래? 우리 재미있게 생활하자. 빨리 병 나으면 집 찾아가야지.』
『집에 안가요 갈수가 없어요. 그 보기 싫은 엄마를 보겠다고 집엘 가요?』
『아니 무슨 소릴 그렇게 하지?』
『수녀님은 모르실거에요. 천사가 악마를 알 수 있나요 수녀님은 내가 어떤 아이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듯 친철하신거죠?』
아! 그들은 정말 우리의 사랑을 믿지 않았다.
『기성아 우리는 천사가 아니야. 기성아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 약한 인간인지도 몰라』
『동정하지 마세요. 밉고 매력 없는 나를 일부러 좋게 대하는 척 하지죠? 싫어요.』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그 후 며칠동안 기성이는 괜히 나만 보면 피하고 외면하더니 어느 날 1호실 병실에 가니 의자를 놓고 앉으라고 권한다.
난 못이기는 척 의자에 앉으며
『참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내가 보기 싫어 도망가던 사람이 나를 이렇게 앉으라고까지 권하니…』
『수녀님 지난번엔 정말 미안했어요. 수녀님께선 저를 알려고 애쓰시고 관심을 가지시니 이 일기장을 보시고 주세요. 몇 번이나 넝마통에 들어갔다가 찾아서 이렇게 때가 묻었어요.』
기성이는 어린애처럼 생끗 웃으며 손때가 잔뜩 묻은 노트한권을 건네준다.
난 남의 일기장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을 때 더욱 그러하다. 요즘도 아이들이 일기장을 아무렇게나 펼쳐놓으면, 『일기장은 자기만이 볼 수 있는 곳에 잘 챙겨야지. 이렇게 아무데나 굴리면 어쩌냐』고 야단을 친다.
난 기성이의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꼬박꼬박 일기를 쓴 것이 기특해서 그 글을 읽어보기로 했다.
지금엔 많은 아이들의 엄청난 사연을 들어서 웬만한 일엔 잘 놀라지 않지 만 난 그때 기성이의 일기를 보며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나이어린 소년이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또 커다란 죄 의식 속에서 몸부림친다. 담배를 피우고 음탕한 잘못을 저지르고 술을 마시고 심지어는 소매치기나 날치기가 된다.
이것은 과연 그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일까?
난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어른들의 잘못이며 그들 책임의 회피로써 빚어지는 소산이라고!
나날이 늘어가는 저능아, 전쟁이 끝 난지 30년이 가까와도 자꾸만 생기는 고아들, 소년범죄. 그러고서도 사회에선 그들을 냉대한다. 기성이의 글에 의하면 기성이도 1년 전엔 고등학교 재학 중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신 후 타락하여 술만 마신다.
엄마는 집에 붙어있지 않고 나돌아 다니며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려고 한다.
화가 난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엄마는 기어이 그 남자를 따라갔다고 한다.
그 후 기성이는 학교에도 안가고 미친 듯 돌아다닌다. 그 무렵 이웃에 사는 두 살 위인 은주라는 누나를 알게 된다. 은주는 기성이에게 갖가지 은혜를 베풀고 고학을 해서라도 학교에는 꼭 다니라고 했다.
어느 날 아침 통학 길에서 기성이는 같은 반 아이와 싸움이 붙었다. 멀리 네거리에서 이 광경을 보던 은주가 기성아! 하고 뛰어오다가 교통사고를 만나 것이다.
기성이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얼마 후 들은 소식…누나가 죽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기성이는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리며 소매치기의 무리에 끼어들었으며 나중엔 병까지 들었던 것이다.
난 그때 알았다. 우리의 친절을 거부하던 기성이의 마음을…
엄마의 사랑을 못 받고 엄마에게 배신당한 그가 누구의 사랑을 믿겠는가?
그 후 기성이는 건강을 회복하여 자기의 큰댁을 찾아가고 단 한번 소식이 왔다.
도로 돌려준 묵주와 상본을 꼭 보내달라고…
그때 기성이의 일기장 끝에 몇 줄의 글만이 나의 생활기록부에 적혀있어 여기에 옮겨본다.
내 마음은 서글픈 계절
쓸쓸한 늦가을이었네
내 마음은 단풍들어 한 두 잎 지고 있었네.
모래강변 그 나무는 시들어가고 내 마음의 씨앗은 말라가네.
눈물은 한없이 흐르고…
난 그 뒤에 이렇게 연결시켰다.
아 이제 봄은 돌아왔네.
가뭄은 그치고 촉촉히 봄비내리네
고요한 미풍은 나의 온 모리카락 날리고…
내마음속에 움튼 연록색 잎 푸르게 녹음지네
비는 그치고 태양은 쏟아지네.
아 이제 무성하여 백배 열매 맺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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