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이북에는 신자들이 있을까? 신자수는 얼마나 될까?그들은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고있을까? 수천명의 신자들이 아직도 지하교회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을것이라고 막연히 추정할뿐 그현황을 알아보기란 불가는에 가깝다.수많은 박해 가운데서도 신앙을 키워온 한민족이지만 종교의 근원을 말살시키는 공산치하에서 어떻게 견디어내고 있을런지 짐작하기조차 힘든것이다. 6ㆍ25 28주년을 맞이하여 포교2백년에 최대의 박해를 받고있는 이북동포 신자들의 실상을 유추해본다.
해방 바로 전 해인 44년 6월 현재 한국교회 신자수는 17만9천1백14명으로 집계됐는데 그중 광주교구통계가 종합되지 못해 광주교구 신자가 5~6천명을 포함하면 18만 3천여명이 었다. 그가운데 이북교구인 덕원 함흥 평양 연길 등 4개교구신자는 5만 7천8명이었다.
그런데 당시 경성(서울) 춘천교구에는 현재 이북지역이 포함돼 있어 해방전 이북신자는 6만여명으로 추산할수있다.
해방후 6ㆍ25동란이 발발할때까지 5년동안 월님한 수는 약3백만명이며 당시 이북 5도 인구수는 1천6백여만명이었다.그러므로 약18%가 월남한 것으로 볼때 월남한 신자수는 만2천여명으로 볼수있다.
월남자수를 빼고도 약5만명으로 추산되는 이북의 신자들은 그동안 어떻게 신앙을 지켜왔을까?
휴전이후 이북교회의 소식은 별반 알려진것이 없다.다만 「눈에 보이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해방후 6ㆍ25동란 이전만 하더라도 월남자들의 증언을 통해 이북교회의 실상을 단편적으로나마 파악할수 있었다.
해방후 6ㆍ25동란이전까지 「경향잡지」에 수록된 북한교회의 탄압상을 재음미해본다.
해방직후 약9개월동안은 민심은 동요를 의식、신앙의 자유를 어느정도 허용했음을 알수있다. 월남패망후 북베트남 정권이 부분적인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것과 똑같은 숫법이었다.
해방후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교회토지가 모두 몰수되었으나 각 교회는 별반 이상 없이 평온히 지낸다고 월남신자들이 증언했다.그러나 46년 5월 20일 드디어 그들은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표면적인 박해가 가장먼저 시작된 곳은 간도지방을 사목하던 연길교구였다.
7할이상의 동포들이 살고있던 연길교구의 만주간도 지방은 독일 베네딕또회 신부들이 1만3천여명의 신자를 사목하던 곳으로 중국 공산군에 의해 가장먼저 박해를 받기시작했다.이어 서울교구는 48년 1월 각방면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연길교구에서 월남한 성직ㆍ수도자ㆍ신자발표를 가졌다.
진상발표에 의하면 해방후 소련군의 만주진주에 따라 간도 방면에 침입한 중국공산군은 46년 5월 20일 오전 9시경 吉東보안사령부에서 연길교구장 백주교를 비롯、독일신부 19명 수사 17명 스위스수녀 15명등 51명을 체포、연길 보안제1단감옥에 감금시켰다.
2일후 한국인신부를 6명을 비롯 중국인신부 1명 한국인수녀 15명 스위스 수녀 15명은 적국이 아니며 또 신민주주의에 있어 『신앙은 절대자유』라면서 종전과 같이 전교하라고 석방하였다.
이것은 민심의 동요를 우려한 일시적 조처로서 한국인신부들을 성당건물이 몰수되어 상당에 가지도 못하고 개인집에 의탁하여 신자들을 지도했다.신부 1명이 4개본당을 담당해야했으며 학생과 청년들은 신부와 의 접촉을 금지당하였고 노인들만 간신히 성사를 볼수있었다.
그러다가 47년 8월 1일부터 사상통일 공작을 병합하여 한국인신부까지 체포하기 시작했다.제1차로 팔도구본당 허창덕 신부와 수녀 3명이 『노동하지않고 신자의 고혈을 착취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다.이들은「착취배」라는 간판을 등에 붙여 시가로 끌고다니는 만행을 자행했다.
2차로 연길의 중국인 조신부와 한국수녀 2명 수사 1명을 투옥하여 뭇매질을 하면서 배교와 결혼을 강요하였다.
이에 당황한 신자들은 최비안네, 김바오로、김빅토리오 신부와、수녀 3명을 조선국경에로 피신시켰다.
따라서 팔로군 점령동부지방에는 투옥된 신부외에는 성직자가 단1명도 없었으며 성당 교회건물은 모두 군사수용소, 회관, 극장, 공장등으로 변신되었다.
종교박해는 교회재산 몰수로 시작되었다. 2차대전시 독일는 전국적으로 독일인 선교단이 관리하는 연길교구내 교회재산ㆍ건물ㆍ토지ㆍ성당내 제구등은 적산이란 구실로 「적산위원회」에서 몰수하였다. 또한 개신교 건물등은 전쟁중 일본이 사용했다는 구실로 몰수하고 목사는 전부 조선으로 추방했다.
연길에 진주한 소련군사령부는 『성당과 예배당에서 아무런 지장없이 종교예식을 집행할수 있다』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으나 그후 팔로군 공작대가 각지로 진출하며 소위 토지개혁 시작때부터 반종교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자들은 모든 조직체에서 숙청되고 지방농회에서는 신앙을 버릭 전에는 농회회원이 될수 없으며 토지분배에서 제외되었다.성서와 성물을 농회에 바치고 군중앞에서 배교를 서약해야만 농회원이 되고 토지분배를 받을수 있었다.배교를 하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하고 그 지방에서 쫓겨나 통행증도 받을수 없어 발붙일수가 없게 만들었다.
연길교구에 박해가 가해지고 있는가운데 황해도 해주성당에서는 46년 9월 26일 복자축일에 김대건 신부 순교1백주년 기념행사에 4천여명이 모였으며 평양관리 주교좌성당은 46년 9월초순 신자들의 헌금으로 성당신축공사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48년 가을、평양에서는 홍주교 집전으로 2명(서보니파시오ㆍ최마지아)이 사제품을 받았고 덕원에서는 연길교구소속 김남수 부제가 신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간도지방을 제외한 기타지역에서는 부분적인 신앙자유가 인정되는듯 하다가 드디어 49년 5월 10일 돌연 덕원신 주교와 신부ㆍ수사들과 원산의 신부ㆍ수녀들을 납치 감금하고 수도원 신학교ㆍ수녀원의 건물과 가구를 몰수하였다.또한 평양 홍주교는 서포에 갔다가 귀환도중 행방불명되었다.
이 소식은 체포하지 않고 해산시킨 덕원신학생중 1명이 평양을 경유、4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여 전함으로서 알려졌다.
49년 12월초순에는 평양6개본당 신부가 모두 체포되었는데 어디에 수감되었는지 알길조차 없었다.특히 평양 신리본당 박디모테오 신부 체포때는 신자들이 성당의 종을 울려 2백여명 신자들이 모여 체포자들과 2시간동안 격투하면서 항거하였다.
이 격투에서 신자들이 다치자 박신부는 자진해서 체포돼 당시 평양에는 3천여명의 신자들이 있었으나 신부는 단1명도 없었다.
50년 5월 6ㆍ25동란이 일어나기 한달전 서울의 14개본당은 6월 15일부터 28일까지 긴박해지는 북한교회신자들을 위해 40시간씩 성체조배를 하기로했다.
6월 24일은 제기동본당、25일은 홍제동본당이었다.
북한 교회를 위한 이와같은 신자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6ㆍ25로 인해 북한교회는 「침묵의 교회」로 굳어지고말았다.
이와같은 상황으로 미루어볼때 6ㆍ25전 약 5만명의 신자중 40대이상 신자는 대부분 타계했을 것이며 휴전이후 가해진 박해로 인해 수천명의 신자들이 지하에서 신앙생활을 하고있을것으로 추정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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