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족의 공동번영과 교회의 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80세란 노령도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던 의지와 인내의 교황 바오로 6세-. 교황으로서의 재임 15년 동안 교회안팎에서 회오리친 갖은 긴장과 시련을 조용히 극복해가며 이 땅에 평화와 행복을 심고 오늘의 가톨릭을 반석위에 올려놓기까지 노 교황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교황 바오로6세의 서거를 계기로 교황의 재위 15년을 간추려본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897년 9월 26일 이태리「보르스치아」교외의「꼰체시오」에서 국회의원을 3차례 역임한 그 지방 신문편집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후 그는「밀라노」교황직속 신학교에서 교회법박사 학위와「로마」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0년 5월 26일 사제로 서품됐다. 서품 후 잠시 본당신부로 활동한 그는 바로「바티깐」의 외교관양성소인「로마」교회학원에 입학했다.
동학원을 졸업한 그는 1922년 당신 25세란 약관으로「바르샤바」주재교황 대사관의 속관으로 근무하다 1년 후에는 이태리 가톨릭액션 대학부교회측보좌로 임명되고 나중엔 그 지도자가 됐다.
1932년 35세 때 교황 삐오 11세로부터 국무성 서기관으로 임명된 그는 4년 후 국무성차관으로 승진됐다. 그러다 1953년 삐오 12세 교황이 추기경에 임명할 뜻을 비치자 결사코 사양한 후 1954년 11월「밀라노」대주교로 전출됐다.
그러나 1958년 12월15일 요한 23세 교황으로부터 추기경에 임명됐으며 요한 23세가 1963년 6월 4일 서거하자 그 뒤를 이어 가톨릭교회 제262대 교황에 선출됐다.
과거 어느 때보다 급박한 세계 정세 속에서 제2차「바티깐」공의회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온 바오로 6세의 교황재위 15년은 결코 화려하거나 휘황찬란한 황제가 아닌「종들 중의 종」의 나날이었다.
바오로 6세는 교황에 등극한 후 처음으로 발표한 성명을 통해『핵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의 필요와 열망에 부웅키 위해 본임자 요한 23세의「현대적응」을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임을 다짐했다. 이 같은 교황의 교도방침은 벽두부터 교회내의 많은 공격과 심한 비난을 받았으나 교황은 소신껏 계획을 추진시켰다.
이러한 바오로 6세의 교황재위 15년은 결국 세계와 교회에 수많은 엄적과 공헌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역대 교황들 가운데 바오로 6세는 교황을 가리켜「바티깐의 포로」라는 전통을 깨뜨린 장본인이다.
그는 사도 베드로 이래 처음으로 성지「에루살렘」을 방문했으며 대서양을 건너 미국 남미 아프리카 극동등지를 순방한 최초의 교황이었다.
세계 어디를 가든 바오로 6세의 최대 관심사는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발전 그것이었다.
1965년 10월 5일 UN본부를 방문한 교황은
『전쟁은 종식돼야한다.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전 세계에 호소하고 분쟁지역들의 빠른 화해를 누차 촉구했다.
교황은 또 정의와 형제애에 입각한 평화만이 인류와 세계를 위한 참다운 평화임을 강조하고 자신이 솔선해서 가난과 질병과 무지로 인해 억눌리고 고통당하는 수천만 무력자의 대변인으로 발 벗고 나섰다.
1967년 3월 발표한 자의교서「제민족의 발전」을 통해 바오로 6세는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와 무신론적 물질주의가 둘 다 세상에 악을 증가시킨다고 경고하면서 강대국들이 약소국이나 개발도상국들에 원조를 아기지 않음으로써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도록 수차 요청했었다.
교황은 또 교회의 사명이 이데을 로기를 달리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공산국가들과 과감히 문호를 개방했다.
1964년 8월 6일 교황 등극후 처음으로 발표한 회칙「하느님의 교회」에서 바오로 6세는 바로 이 같은 신념을 천명했다.
교황의 이와 같은 노력은 헛되지 않아 1971년 3월 공산국가의 원수로서는 최초로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교황을 예방했으며 그 후 계속해서 소련의 포드고르니, 체코의 초세스쿠 수상 등이 교황과 만나 세계평화를 위한 대화를 나누기에 이르렀다. 공산국가들과의 문호개방은 그 후 계속 진전돼 오늘날에 와서는 거의 모든 공산국가들과 교황청과의 외교관계가 활발히 진행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바오로 6세의 치적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로마 꾸리아」(교회중앙 행정기구)를 국제화시켜 과거「로마」일방적 통치형태에서 각 지방교회에 통치권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또 과거 이태리출신 성직자들의 독무대가 돼왔던 교황청요직에 비 이태리인들을 대거 등용시킨 점이라 하겠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과거 어느 교황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바오로 6세의 타 교과 간의 관계개선내지는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을 들 수 있다.
1964년「예루살렘」성지순례와 때를 같이하여 있었던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와의 양교분리 후 9백여 년만의 해후를 선두로 이듬해엔 전 세계 성공회 진도자인 램지 대주교와 만나 양교간의 우의를 다지고 상호일치를 모색키 위한 국제신학위원회를 구성, 현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어 70년 5월엔 모든 아르메니아교수좌 총대주교인 카톨맅코스 바즈겐 1세와「시스띤」경당서 평화의 인사를 교환함으로써 1천5백년간의 단절의 벽을 허물었으며 73년 5월에는 콥트정교회 암바세누다 3세가 교황과 15세기만의 역사적 상봉을 이룸으로써 십 수세 기간의 단절에 종지부를 찍었다.
또 교황은 67년부터 세계 주교 시노드(대의원회의)를 개최, 급속도로 변화해가는 환경에 적응하는 교회의 진로를 모색토록 했다.
한편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이후의 복잡하고 다소 질서가 문란한 과도기적 교회를 이끌어오면서 수많은 비난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나 교리전례 등 예를 들면 회칙「사제독신」이나 알약을 포함한 모든 인공피임법이 신법에 위배됨을 재확인한 회칙「인간의 생명」등이 발표됐을 때 교황은 교황의 무류지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을 받을 만큼 무거운 고통에 곤욕까지 치러야만 했다.
이와 함께 근래에 와서 자신의 은퇴를 강력히 주장한 사람들이나 항명 자르페브르 대주교를 비롯한 교회 분리자들 혹은 교회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자들로 인해 교황이 심적으로 받은 충격 역시 매우 컷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교황의 사생활은 교황청당국의 엄중한 통제로 지금까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으나 최근의 외신이 전한 바에 따르면 교황은 매일 오전 10시에 공식 업무를 시작, 밤늦도록 산더미 같은 일처리에 자신의 건강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교황은 금년 초부터 감기에다 무릎관절 통증까지 겹쳐 심한 고통을 당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지상에서의 소임을 끝내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가 기다리는 하느님의 품안에 안겼다.
그가 생전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세계와 교회에 외쳤던 참된 평화와 진정한 발전을 향해 각자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반성과 새로운 각오가 절실히 요청 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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