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어느 봄날이었다.
창설신부님께선 다른 수녀님 몇 분과 나를 각각 부르신 후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우리가 맡기로 결정이 났다고 하셨다. 모든 여건이 맞지 않지만 결코 그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하시며 이번 새로운 사업을 위해 자매들이 뽑혔으니 미리 마음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날도 진료소의 많은 사람들 속에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데 오늘 2시 낮차로 서울에 갈 예정이니 빨리 일을 중지하고 오라는 전화가 왔다.
언제 이날이 오리라고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주님의 구원사업은 어지간히 급한 거라고 새삼 깨달았다.
서울에 도착해서 생각하니 몇 년 동안 같이 일했던 의사선생님은 물론 진료소 수녀님들께 마저 인사도 못하고 뛰쳐나온 자신이 우습기까지 했다.
5월이라 수녀원 뜰엔 향기 짙은 라일락꽃이 만발하고 벌 나비들은 한가로이 날고 있지만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내 마음은 분주하고 바쁘기만 했다.
그러나 아니 갈수 없는 길, 꼭 가야만 하는 길이다.
가난한 그들과 같이 먹고 마시며 그들과 같이 사는 것이 나의 꿈이 아니었던가. 성모님처럼 일생을 동정녀로 또한 어머니로 사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 주께선 나의 꿈, 나의 소망을 가득 채워 주시는 것이다.
나는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부랑아들의 집단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난 그럴 때마다 자주 이사야가 예언한『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요,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에게 눈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를 놓아주라』는 말씀을 생각했다.
그날 저녁 늦게 서울에 도착하니 먼저 와 계시던 원장수녀님과「소년의집」수녀님들이 반가이 맞아주셨다.
형제들의 다정한 얼굴을 보니 다소 마음이 안정되었지만 내일이면 다가올 나의 새 생활을 생각하니 마치 싸우기 위해 전쟁터로 향하는 초년병의 심사라고나 할까? 「소년의 집」8층의 양호실에서 하룻동안 피로를 풀고 창문을 내다보니 숲에 싸인 아동보호소의 우중충한 건물이 한눈에 보였다.
그렇다. 저곳에선 사회에서 또는 가정에서 소외되고 이탈한 수백 명의 아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생각 같아선 뛰어가서 속 시원히 구경이라도 하고 싶지만 아직도 그곳의 많은 직원들의 이동이 끝나지 않았기에 인수받는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5월2일이 되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우린 가기 전 모두 성당에 모여 기도를 드린 후 신부님 강론 말씀을 들었다.
『우린 지금 개척자의 마음으로 그곳에 임해야 합니다. 예수께선 구원사업을 시작하실 때 먼저고통을 당하셨고 이제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용감히 사명을 위해 앞으로 나가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곳에서는 곧 눈에 보이는 대가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곳엔 항상 일이 터지고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으로써 1명이 한번 죄의 기회를 피했다면 우리는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강한 모험심을 갖고 씩씩하게 그곳에 임합시다.』
강론이 끝나고 우린 둘씩둘씩 짝지어 각자 맡은 분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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