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 선열들의 순교의 얼을 되새기며 우리의 신앙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어보는 복자성월을 맞았다. 지금까지 많은 순교자들이 소개되고 그들의 값진 죽음이 널리 알려져 왔으나 6ㆍ25순교자들의 발자취는 자료수집상의 어려움 등으로 그 순교사실이 묻힌 채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이에 본사는 복자성월을 맞아 6ㆍ25순교자들의 순교기록을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편집자>
1948년 덕원수도원이 폐쇄되고 교회 모든 기관과 성당이 몰수, 성직ㆍ수도자전원이 체포되자 당시 북한천주교 총책임자이던 洪龍浩(프란치스꼬 보을지아) 주교는 북한공산정권에 다음과 같은 항의문을 제출했다.
북한 내무상에 전해진 항의문은
①한국에서 40여년간 농업ㆍ교육ㆍ과학ㆍ문화 등의 발전에 허다한 공헌을 한 선교사들의 체포는 불법이다.
②교회를 폐쇄한 것은 확실한 종교박해로서 북조선정권의 헌법위반이다.
③체포된 전원을 무조건 석방하고 교회를 즉시 개방하라는 4개항으로 홍주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과 교회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위험에 처해있더라도 서릿발 같은 질책을 서슴지 않았던 용감한 목자였다.
1906년 평남 평원군 한천면에서 출생한 홍주교는 20년 서울 용산 성심신학교에 입학, 33년 사제로 서품됐다.
43년 제5대 평양교구장으로 부임한 후 44년 주교로 서품된 홍 주교는 선교에 대한 남다른 열성으로 사제성소와 수도성소계발에 온힘을 쏟았다.
본당 순시 때는 본당 신부 접견 후 제일먼저 보미사하는 어린이들을 접견하는 등 어린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가졌던 홍 주교의 영향은 당시 보미사하던 어린이 대부분(양덕배 신부 등)이 사제의 길을 선택하게 하기도 했다.
홍 주교의 가장 가까운 이웃은 바로 가난한 이들이었다.
전용자가용인 자전거를 이끌고 멀고 험한 산골을 두루 방문하면서 가난하고 무지한 이웃들과 찬교를 나누었던 홍 주교의 소탈하고 겸허한 성품으로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착한목자의 표본이라는 평을 서슴치 않았다. 홍 주교는 시시각각으로 조여드는 공산세력의 위협을 바로 눈앞에 두고 평양교구 봉한 문을 손수지어 교구 내 全신자로 하여금 한마음으로 기도하도록 하는 한편 극심한 성직자부족속에서도(메리눌회 사제들의 본국송환으로) 평양교구 주교좌 대성전을 완공시키도록 주도한 초인적인 투지의 주교였다.
6ㆍ25를 전후로 암울하고 참담했던 공산치하의 평양교구를 이끌었던 홍주교는 48년 강력히 제출한 자신의 항의문으로 결국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 했던 순교자들의 뒤를 이었다.
항의문은 교회말살정책을 위해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온갖 악랄한 방법을 강구하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북한 공산정권에게 홍 주교 납치에 다시없는 기회를 준 것이다.
49년 5월 14일 홍 주교는 그 당시 서포에 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방문, 첫 종신서원 예정자들과의 면담을 마치고 귀가도중 납치당함으로써 6ㆍ25순교의 초석을 이루었다.
<자료제공=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고침
1119호 본란「홍용호 주교」기사의 자료제공처는 「복자수녀회」가 아니고「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이기에 바로 잡읍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