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멸되어가는 북한의 교회에서, 목자 없이 버려진 신사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자기전부를 온전히 바치다 순교한 착한목사…』이 말은 북한교 회의 마지막 종으로서 6ㆍ25때 순교한 전덕표 신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전 신부는 1920년 황해도 남천리에서 출생했다. 46년11월 사제로 서품될 무렵 그는 로마유학의 화려한 꿈과 이민족의 뼈아픈 현실 앞에 갈등을 느꼈다. 그러나 유학을 포기한 전신부는 목자 잃은 양떼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었다. 그는 서품과동시에 사리원본당 박우철 신부를 따라 38선을 넘어 형극의 길을 나섰다. 48년 종교탄압이 노골화되면서 목자들이 체포ㆍ사살되고 수도원과 교회가 몰수당했다 이러한 가운데 북한교회의 총책임자이던 홍 주교가 피납 됨으로써 극도로 살벌해진 북한교회.
나날이 폐허화되어가는 상황 속에 많은 신부와 신학생들이 그들의 탄압을 피해 38선 길목인 사리원본당을 찾아왔다. 전 신부는 몸소 그들에게 안내자를 딸려 이남으로 내려보내면서도 자신은 피신할 생각을 조금도 안했다. 그리고 전 신부는 폐허가 된 성당과 공소를 찾아 몰래 미사를 드리고 밤새워 그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 이러한 고달픈 나날 속에서도 전 신부는 학생들의 교리교육을 중시했다.
특히 79위 복자학생단을 조직, 매일 밤 그들에게 하느님을 증거한다. 순교한 79위복자의 생애와 정신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쩌면 미구에 닥칠 자신의 순교를 미리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6ㆍ25가 발발하고 마침내 전쟁의 소용돌이가 깊어가는 10월, 전 신부는 나이 많은 본당신부를 신자들과 함께 피신시키고 같이 피난하자는 본당신부의 간곡한 권유를뿌리치고 자신은 계속본당을 지켰다. 그 후 전투가 치열해지자 전 신부는 사리원시외로 잠시 피신했다. 그러나 유엔군이 사리원에 입성하기 5일전 버리고 온양들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던 전 신부는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이미 불바다가 된 사리원 시내로 다시 들어갔다. 그날 이후로 전 신부는 영영소식이 없었다.
후일 감옥에 같이 갇혔던 어느 목격자는 전 신부가 전기고문을 비롯한 온갖 고통스런 고문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꿋꿋이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갇힌 사람들을 위로하고 끝내 양들을 지키다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제물로 바쳤다고 전해주었다. 그 후 신자들은 정치 보위부 뒤뜰방공호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전 신부의 유해를 찾아내 50년 10월 17일 사리원 성당에서 엄숙하게 장례식을 거행했다.
신자들뿐 아니라 외교인들까지 전 신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울음의 행렬 속에 전 신부의 유해는 상묏산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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