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6일 저녁 평양 선교리본당에서는 목자를 빼앗아가려는 약탈자와 그를 지키려는 신자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수백여 선교리본당 신자들의 인자한 목자이며 다정한 친구였던 박용옥(디모테오) 신부를 지키려는 신자들의 노력은 결사적이었다.
박용옥 신부는 1912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김필현 신부와 함께 한국교회의 첫 로마유학생으로 울바노 대학을 졸업한 박 신부는 38년 3월 18일 성도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신의주본당보좌ㆍ중화본당주임을 역임한 다음 44년 선교리본당에 부임했다. 박신부의 사제적 성품은 짜여진 일과 속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기도와 사목활동에서 잘 나타났다. 하루 세 번 삼종은 몸소 일각의 어김도 없이 쳤고 항상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은 신자들의신앙심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겸양의 목자와 일치를 이룬 신자들은 여러 신심단체를 탄생시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다시압제자의 지배하에 들게 된 북한교회는 시시각각 조여드는 공포분위기속에 휩싸였고 선교리본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홍 주교의 피납을 시작으로 신부들이 하나 둘 행방불명되었다.
각 본당에서는 매일 저녁 성체강복과 함께 홍 주교의 석방, 조국평화, 남북통일, 러시아의 회개를 위한 기도가 계속되었고 신자들은 목자를 지키기 위해 항상 목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 같은 공포분위기속에 가을판공이 시작됐고 판공시작 이틀째인 12월 6일 선교리의 거룩한 성전은 수난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소위 정치보위부원이 박 신부를 체포하러 파견되어왔었다. 수난의 조짐을 눈치 챈 신자들은 성당으로 몰려들었고 성체강복시간에 박신부는 성합을 모두 비웠다. 목자의 위험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신자들은 박 신부를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며 겹겹이 박 신부를 둘러쌌다. 또한 이본당 신자인 이규칙(베드로)씨는 종을 울려 신부의 위험을 알렸다. 신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공산당들은 증원해가며 신자들과 격투를 벌였고 종을 치던 이규식씨는 공산당의 발길에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난타를 당하면서 목자를 지키려는 울부짖음은 온 마을을 분노에 떨게 했으나 양들의 수난을 보다 못한 박 신부는 자진해서 묵묵히 정치 보위부원의 차에올라 영영 돌아오지 못할길로 떠났다.
남달리 성모께 대한 신심이 깊어 평소 성모 헌원미사를 즐거이 봉헌했던 박신부. 맡겨진 양들을 성심껏 돌보던 박용옥 신부는 피로 붉어진 북한땅에 빛나는 십자가로 남았다
<자료제공=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ㆍ평양신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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